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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학의 내가 스며든 박물관] ‘진심’이 통하는, 세상에서 가장 큰 스케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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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2. 07. 18:04

<17> 미국 뉴욕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
뉴욕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의 이용객
스케치북을 보고 있는 뉴욕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의 이용객들.
누구나 살면서 그 무엇엔가 사로잡혔던 경험들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매혹됨의 원인은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가'의 문제였을 거라 짐작한다. 그 진심에는 상상력과 인간미, 감동과 열정, 공감과 배려 같은 것이 섞여 더 멋져 보였거나, 더욱 오랫동안 가슴에 남게 되지 않았을까. 오늘 '진심'을 앞세워 사람의 마음을 여는 공간을 찾아간다. 기발한 상상력보다는 그 마음을 지켜온 먹먹한 감동이 우리의 등을 토닥여주는 그곳으로.

미국 뉴욕의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에 들어서면서 나는 적이 당황스러웠다. 미술관, 도서관, 박물관이 가지는 다양한 경계가 무너졌다고 느꼈다. 전 세계 사람들이 만든 수만 점의 사연 있는 그림들이 모여 있다기에, '세계의 천재작가들이 책을 만들어 봉헌하는 곳'이거나 '세계 그림쟁이들이 여행길에서 만난 특별한 시간을 모은 곳'이겠거니 했는데, 지레짐작은 금세 무너지고 말았다. 작품의 개방성과 접근성을 생각한다면, 이곳을 좀 거창하게 '글로벌 창작 커뮤니티의 허브'라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다.

130개국, 3만여 명의 글로벌 크리에이터가 보내온 4만5000권 이상의 스케치북과 2만권 이상의 디지털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큰 스케치북'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성장해서 많은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고, 그들의 단절된 예술 경력을 이어주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음식 레시피, 여행담, 자서전적 그림, 콜라주 등 다양한 개성의 표현방식을 담고 있으며, 각기 다른 배경의 사람들 이야기를 세계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열람방법을 안내하는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 안내판
개인별 열람방법을 안내하는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 안내판.
인쇄업자인 스티븐 피터먼와 웹 개발자인 쉐인 저커는 2006년 미국 남부 애틀란타에서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감상하는 '스케치북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들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보통 사람들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이제 그것은 상상을 넘어 다소 의외의 미술관이 된 것이다. 창의적인 공동체가 예술가 개인들보다 더 강할 수 있고, 전통적인 갤러리나 뮤지엄과는 다른 방식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지켜냈기 때문이다. 우리도 가끔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 있는, 아득한 욕구의 교차점에 서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지 않는가.

이 프로젝트의 참가자들은 빈 스케치북을 주문하고, 주제를 선택해서는, 자신의 이력과 독특한 내용을 담아 온라인에 연결한다. 그리고 그 스케치북은 다시 이 도서관으로 보내져 방문객들이 볼 수 있도록, 상상을 뛰어넘는 목록으로 분류된다. 관람객들이 무료로 받은 도서관 카드를 스캔하면 가로 5인치, 세로 7인치, 총 32페이지의 스케치북 갈피에서 '누군가의 삶에서 뛰쳐나온 멋진 순간'을 만날 수 있다. 온라인에서는 예술가의 이름, 나라 또는 주제에 따른 컬렉션의 상당 부분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이렇게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크라우드 소스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결합되어 창의적인 작업을 하는 또 다른 이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예술가가 되는 경험과 교감이 문화적 다양성과 세계적 교류를 견인한다고 보는 시각과도 다르지 않다.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의 홍보대사, ‘북모바일’
다양한 현장에서 인기가 높은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의 홍보대사, '북모바일'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은 '북모바일(bookmobile)'이라는 의미 있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다. 소장 스케치북 500~800권 정도를 엄선, 앙증맞은 삼륜차에 싣고 학교나 기업의 현장을 찾아가 새로운 관람객을 만나는 이벤트인데, 세계 어디라도 갈 수 있다고 홍보하는 '현대판 예술보부상'인 셈이다. 여기에서 학생들은 풋풋한 창의성을, 기업들은 글로벌한 영감을 받는다. 단순히 보여주는 데만 그치지 않고, 가려 뽑은 그림들로 만든 책을 제공하거나, 나름대로 정한 주제로 대화형 플랫폼을 만들어 참가자들의 예술적 경험치를 높여준다. 창의적인 기업이라면, 이만큼 글로벌한 워크숍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북모바일'은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의 유명도시를 방문 중이다. 돌아오면 7500여 권의 스케치북이 다시 컬렉션에 더해질 것이다.

피터먼과 저커는 2010년에 지금의 장소인 윌리엄스버그로 그 창의적 플랫폼을 옮겼다. 오늘날 윌리엄스버그는 뉴욕의 브루클린을 대표하는 창조예술의 중심지로서, 앞으로도 새로운 예술적 실험·트렌드가 끊임없이 출현하는 '글로벌 문화융합지대'로 성장했다. 글로벌 유행에 맞서 '로컬리즘'과 '아날로그 감성'을 중시하며, 자유·평화·다양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가는 이곳은 젊은 창작자, 다양한 이민자, 그리고 예술·음악·패션의 팬덤들이 계속해서 유입되어 뉴욕의 문화적 리더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누구든 25달러를 내면 32쪽의 빈 스케치북을 구입할 수 있는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 이용자들은 그 스케치북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아 이곳으로 보내면 또 하나의 컬렉션에 더해지고,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훌륭한 여행도구가 된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곳을 다녀온 이들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너의 이야기를 나누고, 너의 그림을 그리고, 그냥 그것을 나눠주라!'는 귓속말이 '당신도 예술가가 될 수 있어!'로 들리는 마법에 걸리게 될 것이다.

'대학(大學)'에 '시이불견(視而不見) 청이불문(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바른 마음으로 집중하라'는 삶의 충고다. 다시 말하면, 시청(視聽)이 아니라 견문(見聞)의 자세가 더 중하다는 것이다. 예술을 감상하고 느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명작이란, 온 마음으로 작품을 남긴 사람들을 향해 절절하게 느낀 마음들이 쌓여 이루어진 것이다. 오늘, 많은 이들이 '브루클린 아트 도서관'을 찾는 것은 문화와 예술을 지키고, 키우고, 사용하는 바른 가치를 알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곳의 미래는 세상의 다양한 지역커뮤니티를 통해 '끝없는 창조의 실험장'이 될 거라 믿는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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