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소년 참여에서 엘리트 성과까지 이어지는 일본식 스포츠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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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의 '캡틴 츠바사', 농구의 '슬램덩크', 배구의 '하이큐!!', 그리고 스트라이커 재탄생을 내건 '블루 록'까지. 이 네 작품은 각기 다른 시대와 종목에서 등장했지만, 공통적으로 스포츠를 "보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해 보고 싶어지는 것"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지금 일본 축구·배구·농구가 보여주는 성과는, 그런 이야기가 만든 토양 위에 자라난 한 세대의 결실이기도 하다.
◇ 만화는 어떻게 생활 체육의 입구가 되었나
1980년대 시작된 '캡틴 츠바사'는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 일본식 축구 이미지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축구를 잘 모르는 아이도 이 만화를 통해 드리블, 패스, 슛의 흐름을 이해하고 경기의 리듬을 체감했다. 수천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작품은 수많은 선수와 팬들이 "축구를 시작하게 만든 계기"로 반복 언급된다.
1990년대의 '슬램덩크'는 농구에 대해 정보가 많지 않던 세대에게 농구 코트의 문을 열어줬다.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된 이 만화는 불량 소년이 농구부에 들어가 성장하는 과정을 통해, "운동을 못한다"고 느끼던 청소년에게까지 농구의 세계를 열어줬다. 일본에서는 이 작품을 계기로 농구부 지원자가 급증했고, 이후 "슬램덩크 세대"가 일본 농구 선수층과 팬덤의 기반이 됐다는 평가다.
2010년대에는 배구 만화 '하이큐!!'가 배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만들었다. 키가 작아 불리하다고 여겨지던 주인공이 점프력과 스피드로 한계를 깨는 서사는, 체격 콤플렉스를 가진 청소년에게 강한 호응을 얻었다. 작품은 세트, 리시브, 블로킹 같은 전문 용어와 규칙, 전술을 드라마와 함께 보여주며 독자가 쉽게 익히게 했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점은 단순하다. "나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것. 만화는 스크린 속 스타보다 긴 시간, 가까운 거리에서 독자와 함께한다. 아이들은 수십 번씩 주인공의 플레이를 상상하며, 결국 공을 사고 체육관을 찾는다. 생활 체육의 입구는 그렇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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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츠바사'의 주인공은 탁월한 볼 터치, 시야, 게임 메이킹 능력을 가진 플레이메이커다. 그는 패스워크와 동료 연계를 강조했다. 이 만화 성공 이후 일본 축구는 미드필더가 강한 나라라는 인식을 굳혔고, 기술형 미드필더와 조직적 플레이를 중시하는 스타일은 실제로 일본 대표팀 정체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강점은 동시에 약점도 만들었다. 일본 축구는 오랫동안 "결정적인 한 방을 책임질 스트라이커가 약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 작품이 바로 '블루 록'이다. 2018년 연재를 시작한 이 만화는 "일본 축구가 월드컵 우승을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이기적인 스트라이커가 필요하다"는 전제로 출발한다. 일본축구협회가 전국 300명의 고교 스트라이커를 모아 오직 한 명의 최종 생존자를 뽑는 서바이벌 훈련소를 만든다는 과격한 설정이다.
'블루 록'은 팀을 위해 헌신하는 조연이 아닌, 팀을 자기 무대로 만드는 주연 스트라이커의 욕망과 에고를 전면에 내세운다. 기존 스포츠 만화의 미덕인 "우정과 팀워크" 위로, "나만의 골"을 향한 집착을 덧씌우는 셈이다.
이 파격은 실제로 일본 유소년 세대의 포지션 인식에 영향을 주고 있으며, 플레이메이커를 동경하던 시선이 최전방 공격수에게로 이동하는 흐름이다.
흥미롭게도, 이 작품이 나온 시기와 일본 대표팀의 경기력이 겹친다. 일본은 2022년 카타르 월드컵에서 독일과 스페인을 꺾고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이후 2026년 월드컵을 앞두고는 "4강, 나아가 우승까지 노릴 수 있다"는 자신감 어린 발언이 나온다.
물론 일본 축구 성장에 J리그 안정화, 아카데미 발달 등 다층적인 요인이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미드필더 왕국을 만든 '캡틴 츠바사' 시대에서, 스트라이커 재탄생을 외치는 '블루 록'의 시대로 상상력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플레이 스타일과 포지션 철학은 결국 문화적 상상력 위에 서 있으며, 그 상상의 상당 부분을 만화가 책임져왔다는 사실은 스포츠비즈니스 관점에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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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와 농구도 마찬가지다. '하이큐!!'와 '슬램덩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대를 만들었고, 지금 일본 배구와 농구는 만화에 열광하던 세대가 성장한 결과를 보여준다.
먼저 배구. 일본 남자 배구 대표팀은 최근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고 있다. 2024년 기준 세계 랭킹 상위권이며, 2023년과 2024년 남자 발리볼 네이션스리그에서 각각 3위와 2위를 차지했다. 도쿄 및 파리 올림픽에서 연달아 8강에 오르며, 세계 정상권 경쟁에 다시 합류했다는 평가다.
이 배경에는 유소년 강화 정책과 더불어, '하이큐!!' 이후 배구를 시작한 세대의 유입이 겹쳐 있다. 작품 속 배구는 다양한 재능이 발휘되는 팀 스포츠로 그려졌고, 그 축적이 대표팀의 폭과 깊이를 키웠다.
농구도 마찬가지다. 일본 남자 농구는 2023년 농구 월드컵에서 3승 2패로 아시아 국가 중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둬 2024년 파리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2019년 대회 전패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변화다.
이와 동시에 일본은 NBA에도 꾸준히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루이 하치무라가 LA 레이커스에서 활약하고, 유타 와타나베 역시 NBA 무대를 밟았다. 2024년에는 토미나가 케이스케가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계약하며 NBA 진출 라인업이 다양해지는 중이다.
농구 인구를 폭발시킨 '슬램덩크' 세대와 이후 B리그 출범을 거친 세대가 만나, 이제 "NBA에 일본인 선수가 있는 것"이 기적이 아닌 시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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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결과를 만화 하나의 영향으로만 볼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일본이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의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해왔다는 점이며, 그 입구에 스포츠 만화가 놓여 있었다는 사실이다.
학생들은 만화를 보고 흥미를 느끼고, 학교의 부활동을 통해 종목을 선택한다. 일본 중·고교 부활동은 입시 특혜는 없지만, "좋아하는 것을 할 권리"를 존중하는 구조다. 청소년이 운동에 쓸 자율 시간이 늘어난 것도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이렇게 형성된 폭넓은 유소년 풀 위에, 아지노모토 내셔널 트레이닝 센터 같은 과학적 훈련시설이 얹힌다.
일본은 한국의 태릉선수촌을 벤치마킹해 2000년대 후반 이 센터를 설립했고, 대표팀 강화와 유망주 육성의 허브로 활용해 왔다. 생활 체육에서 엘리트 체육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촘촘한 발판을 설치한 셈이다.
스포츠 만화가 흥미를 만들고, 부활동이 참여의 장을 제공하며, 국가 시스템이 재능을 발굴하고 다듬는 구조. 생활 체육과 엘리트 체육이 "같은 강의 상류와 하류"처럼 연결될 때, 만화라는 문화 콘텐츠는 비로소 산업과 경쟁력이라는 결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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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웹툰 강국이며, 스포츠 웹툰과 드라마도 꾸준히 만들어진다. 프로 구단들도 IP와 협업하는 시도를 시작했다. 다만 이 흐름이 "실제 운동장에 얼마나 사람을 불러내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아직 성적표가 뚜렷하지 않다. 엘리트 중심 구조는 여전히 공고하고, 학교 체육과 생활 체육 사이의 간극은 넓다. 문화 콘텐츠는 넘치는데, 그것이 생활 체육과 이어지는 구조는 취약한 편이다.
일본의 사례는 "문화가 생활 체육의 입구가 될 수 있다"는 점과 "생활 체육이 엘리트 경쟁력과 산업 성장을 지탱한다"는 점을 동시에 보여준다. 한국이 스포츠비즈니스를 이야기할 때, 단순히 관중 수와 스폰서십 금액만을 볼 것이 아니라, 웹툰과 애니메이션을 통해 만들어지는 스포츠 이미지가 실제 참여로 이어지는 구조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종목 웹툰이 인기를 얻었다면, 그 시기에 맞춰 해당 종목의 유소년 체험 행사, 학교 연계 프로그램, 지역 클럽 입문 코스를 묶어내는 기획이 가능하다. 만화가 만든 "나도 해보고 싶다"는 감정을 받아줄 수 있는 인프라를 준비하는 것이다. 문화, 체육 행정, 학교, 프로 구단이 같은 그림을 보고 움직여야 가능한 일이다.
◇ 이야기가 뛰게 만들고, 산업이 그 뒤를 따른다
'캡틴 츠바사'의 패스, '슬램덩크'의 점프, '하이큐!!'의 블로킹, '블루 록'의 골. 이 허구의 그림을 본 아이들의 발은 실제 운동장을 향했다. 일본 축구, 배구, 농구가 성과를 내기까지 그 긴 여정의 맨 앞에 만화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불씨다. 아이들이 책을 덮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는 학교의 부활동이 참여의 문을 열어야 하고, 지역 클럽이 실력을 다져야 하며, 국가 시스템이 성장 동력을 책임져야 한다. 불씨가 꺼지지 않고 화력으로 이어지게 만든 것은 생활 체육과 엘리트 구조를 잇는 일본의 오랜 투자와 조직화였다. 일본의 성공은 결국 만화가 아니라 인프라와 철학의 승리라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도 문화 콘텐츠 경쟁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문제는 콘텐츠가 실제 운동장 참여로 이어지는 통로가 협소하다는 데 있다. 입시 체계는 엘리트 중심이고, 생활 체육을 접할 기회도 고르지 않다. "흥미를 키우는 데는 성공했는가. 그렇다면 뛰게 만들 준비도 갖춰져 있는가."
만화가 뛰게 만들고, 시스템이 그 뛰는 몸을 지탱한다. 스포츠의 미래는, 상상력이 만들어낸 첫 장면을 얼마나 빠르고 촘촘하게 현실의 구조로 연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한국 스포츠가 고민해야 할 지점은, 한 권의 만화책이 불러낸 그 설렘을 결코 흘려보내지 않는 방법이다. 바로 그 연결이 산업을 움직이고, 국제 경쟁력을 만든다. 이야기는 시작을 맡는다. 다음 장을 쓰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