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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혁신보다 먼저 도착한 부(富), ‘서류상 억만장자’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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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경 기자

승인 : 2026. 01. 18. 16:09

화면 캡처 2025-12-30 101351
아라빈드 스리니바스(31) 퍼플렉시티 최고경영자(CEO)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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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억만장자가 되는 데 필요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 과거에는 강산이 변할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2000년대 초 닷컴 붐 시절에도 최소 몇 년의 시행착오는 거쳐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제품 하나 없이도, 심지어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억만장자의 반열에 오른다. 부의 축적 속도가 인간의 보편적 이해와 물리적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성공담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는 일종의 '위화감'에 가깝다.

최근 인공지능(AI) 열풍이 만들어낸 풍경은 경이롭다기보다 기이하다. 오픈AI 출신의 미라 무라티는 '싱킹머신스랩'을 설립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10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달성했다. 역시 오픈AI 출신 일리아 수츠케버는 AI 스타트업을 설립한 뒤 아직 시장에 내놓은 제품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32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가치를 인정받았다. 퍼플렉시티나 법률 AI 스타트업의 하비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선 '아직 팔 것도, 증명할 것도 없는 단계'라는 공통점이 발견된다. 숫자는 화려하지만 그 이면은 텅 비어 있다. 이 기형적인 성장 속도는 대단하다는 감탄보다는 '이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구심을 자아낸다.

과거의 억만장자들과 비교하면 이 위화감은 더욱 뚜렷해진다. 세계 최고 부자인 일론 머스크조차 1999년 엑스닷컴을 창업한 후 페이팔 매각과 테슬라 상장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 억만장자가 되기까지 13년이 걸렸다. 제프 베이조스 역시 물류 창고에서 책을 포장하며 '시간'과 '과정'이라는 리스크를 온몸으로 견뎌냈다. 그러나 지금의 신흥 부자들에게선 리스크의 검증 단계가 통째로 생략되어 있다. 과거의 부가 '결과에 대한 보상'이었다면, 지금의 부는 '가능성에 대한 선지급'이다.

왜 이렇게 빨라졌을까. 챗GPT 이후 투자 시장은 이성적인 판단력을 잃은 듯 보인다. 이제 기술력 자체보다 '기대의 경쟁'이 기업가치를 결정한다. 투자자들은 혁신의 실체를 확인하기보다, 남보다 늦게 올라탈까 봐 두려워하는 포모(FOMO) 증후군에 시달리며 자금을 쏟아붓는다. AI는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도구여야 하는데, 시장은 이미 그 도구가 가져올 결실을 확정된 미래인 양 계산해버린다.

여기서 우리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이들이 거머쥔 부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냉정히 말해 그들은 '서류상 억만장자(Paper Billionaire)'일 뿐이다. 주식 평가액이라는 가상의 숫자 위에 세워진 성은 시장의 찬바람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는 신기루와 같다. AI는 분명 혁신을 약속했지만, 지금의 시스템이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혁신가보다 먼저 부자가 되는 구조다.

결국 질문은 다시 우리에게 돌아온다. 이들 중 누가 살아남아 약속한 미래를 보여줄 것인가. 벤처캐피털 사파이어 벤처스의 자이 다스가 지적했듯, 스타트업이 약속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순간 이 화려한 숫자는 덧없이 사라질 것이다. AI는 인류의 미래를 단축시켰다고 칭송받지만, 동시에 실패에 도달하는 속도 역시 그만큼 단축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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