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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노멀 고베②] 사람 떠나던 항구에서, 다시 남는 도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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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재 도쿄 특파원

승인 : 2026. 01. 23. 12:46

고베가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 그리고 재건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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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시 주오구(神戶市中央區) 하토바초(波止場町) 메리켄파크. 고베 포트 타워 앞 항만 녹지 위에 청동으로 빚은 가족상이 있다. 1908년 일본의 최초 브리질 이민가족상이다. /사진=최영재 도쿄 특파원
1908년 4월 28일 일본 고베항. 이민선 가사도마루(笠戶丸)가 부두를 떠났다. 배에는 일본인 781명이 타고 있었다. 목적지는 브라질. 일본 정부와 브라질 측의 협약에 따라 농업 노동 계약을 맺은 이주민들이었다. 출항은 공식 기록으로 남아 있다. 고베는 그 날짜와 배 이름, 인원을 지금도 항구에서 설명한다.

이 출항의 조건 역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주민들이 배정된 공간은 갑판 아래, 3등선실이었다. 가사도마루의 3등선실은 화물칸과 인접해 있었고, 자연 채광은 제한적이었다. 낮에도 내부는 어두웠고, 환기는 충분하지 않았다. 침상은 개인별로 구분되지 않았다. 나무 바닥 위에 짚으로 엮은 매트가 일정 간격으로 놓였고, 남성과 여성, 아이들이 같은 공간을 사용했다. 개인 짐은 머리맡이나 발치에 두는 수밖에 없었다.

항해가 이어지는 동안 선실 바닥은 늘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파도가 높아질수록 몸은 한쪽으로 쏠렸고, 배의 진동이 그대로 전달됐다. 위생 시설은 제한돼 있었고, 이용을 위해 줄을 서야 했다.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배급됐으며, 쌀과 염장 식품 등 장기 항해에 적합한 식재료가 중심이었다.

항해 기간은 수주에서 한 달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는 뱃멀미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아이들은 하층 선실 바닥에서 잠들었다. 이주민 다수는 도착 이후의 노동 환경과 생활 조건을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배에 올랐다. 배 밑바닥은 출항의 기대보다 불확실성이 먼저 체감되는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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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최초의 브라질 이민가족 조형물 옆에는 설명판이 있다. 최초이민 출항 연도와 날짜, 목적지, 이후 하와이와 남미로 이어진 이주 흐름이 연표와 사진으로 정리돼 있다./사진=최영재 도쿄 특파원
◇1908년 일본 최초의 브라질 이민선

이 장면은 지금도 고베항 한복판에 남아 있다. 고베시 주오구(神戶市中央區) 하토바초(波止場町) 메리켄파크. 고베 포트 타워 앞 항만 녹지 위에 청동으로 빚은 가족상이 있다. 성인 남자와 여자, 손을 맞잡은 아이 등 최초 브라질 이민자 3인 가족상이다. 청동 조형물 옆에는 대형 설명판이 나란히 놓여 있다. 조형물의 제목은 '희망의 출항(希望の船出)'이었다.

설명판 상단에는 '고베와 해외 이주(神戶と海外移住)', '이민선 기사도마루(移民船 笠戶丸)'라는 문구가 명시돼 있다. 출항 연도와 날짜, 목적지, 이후 하와이와 남미로 이어진 이주 흐름이 연표와 사진으로 정리돼 있다. 이곳은 장식물이 아니라 기록의 자리다. 고베는 이 항구에서, 누가 언제 어디로 떠났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취재가 이뤄진 1월 20일, 고베항에는 차갑고 강한 바닷바람이 불었고 진눈깨비가 흩날렸다. 인근 고베 포트 타워 전망대에 올랐을 때 강풍에 타워가 흔들리는 감각을 느낄 정도였다. 손이 시릴 정도의 추위 속에서도 이민자 조형물과 설명판은 차양이나 보호각 없이 항구 공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고베는 과거를 실내로 옮겨 보관하지 않는다. 도시의 현재 동선 위에 둔다. 이 선택은 고베가 겪은 또 하나의 단절과 연결된다. 30여년 전인 1995년 1월 17일, 고베는 한신·아와지 대지진을 겪었다. 6434명이 숨졌고, 항구와 도심은 동시에 붕괴됐다. 항만 기능은 멈췄고, 도시의 시간도 정지됐다.

이후 고베는 항구를 재건했다. 그러나 재건은 단순한 복구로 끝나지 않았다. 고베는 상실의 기억을 제거하지 않는 방식을 택했다. 해외로 떠났던 사람들의 기록과, 재난으로 잃은 도시의 시간은 분리되지 않는다. 같은 도시의 역사로 병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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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고베 대지진 때 모습. /연합
◇1995년 고베 대지진, 30년의 재건.

고베항의 최초 이민자 조형물은 특정 인물을 기념하지 않았다. 남성·여성·아이로 구성된 이주민 가족의 일반상이었다. 영웅이나 성공 사례가 아니었다. 집단의 이동 자체를 기록한 기록물이었다. 이는 1995년 대지진 이후 고베가 구축해온 재건의 태도와 겹친다. 고베는 성공만을 선별하지 않고 있다. 실패와 상실, 떠남과 붕괴까지 포함해 도시의 시간으로 남기고 있었다. 사실을 기록하고, 도시가 감당하는 방식이다.

인구감소 시대, 항구도시 고베는 새로운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더 이상 사람을 끌어모으지 못할 때 도시는 무엇으로 남을 것인가. 고베는 답을 항구에서 찾았다. 떠났던 기록을 숨기지 않는 것, 재난의 흔적을 지우지 않는 것, 그리고 그 기억을 도시 한복판에 고정하는 것. 이 기억 관리 방식이 있었기에 지난 30년 동안 고베의 항구 재건은 기능 회복을 넘어 정신의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한국도 부산과 인천 등 수많은 사람을 떠나보낸 항구도시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고베항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분명하다. 항구는 얼마나 많은 화물을 처리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삶을 통과시켰는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고베는 그 답을 항구 위에 남겨두고 있었다.
최영재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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