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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심장부서 피어난 ‘문화보국’...이건희 컬렉션, 한국 미술의 위상 재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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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1. 29. 13:19

'중·일의 그늘' 걷어낸 이건희 컬렉션
美서 확인한 '한국 미술'의 독자적 서사
삼성家 총출동, 워싱턴 갈라 피날레
이재용 "문화유산 보존 의지 굳건”"
이재용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예술산업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념 갈라 만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1월 28일(현지시간) 저녁, 미국 워싱턴 D.C. 내셔널 몰의 밤은 한국 예술의 여운으로 깊어갔다.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 인근 예술산업관(Arts and Industries Building)에는 한국의 재계 총수 일가와 미국의 핵심 정·관계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고(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기증품을 선보인 첫 해외 순회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의 성공적인 대장정을 기념하는 갈라 만찬이 열린 현장이었다. 오는 2월 1일 폐막을 앞두고 열린 이날 행사는 단순한 전시 종료 행사가 아닌, '문화보국(文化報國)'의 유지(遺志)가 세계 외교의 심장부에서 열매를 맺는 순간이었다.

이재용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예술산업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념 갈라 만찬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 이재용·홍라희 등 삼성家 총출동…워싱턴을 무대로 한 '이건희 컬렉션'의 민간 문화외교

이날 갈라 만찬에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비롯해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관장·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서현 삼성물산 사장·김재열 삼성글로벌리서치 사장 등 삼성가가 총출동했다. 이들이 해외 공식 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건희 선대 회장의 '수집 철학'과 '기증의 의미'를 그만큼 무겁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미 정·관계와 재계 핵심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정·관계에서는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로리 차베스-디레머 노동부 장관·마이클 크라치오스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 팀 스콧·테드 크루즈·빌 해거티(공화)·앤디 김(민주) 상원의원, 웨스 무어 메릴랜드주 지사, 강경화 주미 한국대사 등이 참석했다.

재계에서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웬델 윅스 코닝 회장·제리 양 야후 공동창업자·개리 디커슨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 최고경영자(CEO)·누바 아페얀 플래그십 파이오니어링 CEO·베네데토 비냐 페라리 CEO 등이 자리했다. 한국전쟁 참전용사 4명도 초청됐다.

홍라희 관장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부인 홍라희 리움미술관 명예 관장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예술산업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념 갈라 만찬장으로 들어가고 있다./워싱턴 공동 특파원단
이재용 회장 러트닉 장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오른쪽)과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이 28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예술산업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념 갈라 만찬장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다./삼성전자 제공
이재용 회장은 이날 인사말에서 "이번 전시를 미국의 수도인 워싱턴 D.C.에서 선보일 수 있어 큰 영광"이라며 "미국과 한국의 국민이 서로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당시 3만6000명이 넘는 미국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은 지금처럼 번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한국전쟁 등의 고난 속에서도 이병철 창업회장과 이건희 선대회장은 한국 문화유산을 보존해야 한다는 굳건한 의지가 있었다"며 홍라희 명예관장이 고대 유물부터 근현대 작품까지 컬렉션의 범위를 넓혀온 과정도 언급했다.

스미스소니언
28일(현지시간) '이건희 컬렉션' 전시 기념 갈라 만찬이 진행된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예술산업관./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이건희 컬렉션
'이건희 컬렉션'이 전시된 미국 워싱턴 D.C. 스미스소니언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 입구로 28일(현지시간) 찍은 사진./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韓 미술은 독자적 서사"…'중·일의 그늘' 걷어낸 '이건희 컬렉션' 워싱턴 전시의 기적

이처럼 갈라 만찬이 '결과'를 보여줬다면, 전시가 남긴 더 큰 의미는 그 결과를 가능하게 만든 '과정', 그 과정이 만들어낸 '서사'에 있다. 워싱턴 D.C. 내셔널 몰의 심장부에서의 '이건희 컬렉션' 전시는 한국 미술이 더 이상 '이방인의 호기심'이 아니라, 세계 미술사 속 주류(mainstream)의 언어로 재배치되기 시작한 것을 알리는 메시지였다.

전시는 "한국 미술이 중국·일본 미술의 부속이 아니라 독자적 목소리로 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정치가 멈춘 자리에서 문화가 재가동한' 미국 연방정부 셧다운(일시적 업무정지)의 비하인드를 통해 더 선명해졌다.

이번 전시는 개막 전인 지난해 10월 셧다운이라는 암초를 만났다. 스미스소니언이 문을 닫자, 수년간 준비한 첫 해외 순회전이 시작도 못 하고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물밑 협의 끝에 전시는 셧다운 종료 직후인 11월 15일 극적으로 개막했다.

이 과정은 전시의 메시지와 맞물리며, 단순한 '운영 고생담'이 아니라 전시가 작동하는 제도적 구조를 드러내는 사건이 됐다. 정부 기능이 멈춰 박물관이 닫힌 상황에서도 전시를 지탱한 것은, 제도 바깥의 한국 파트너(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 등)와 제도 내부의 운영 역량(박물관 직원들의 작업)이 교차하는 협업 체계였다는 점에서다.

전시가 '작품'만이 아니라 '설명 방식' 자체를 바꾸려 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서구 박물관에서 한국 미술은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설명돼 왔다. 이번 특별전이 흔든 것은 그 지리적 배치가 아니라, 그 배치가 암묵적으로 강제해 온 해석의 틀이었다. 전시는 1500년에 걸친 시간축을 통해 "한국 미술은 독자적 완결성을 가진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보다, 관람객이 '체험'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폐막일까지 누적 관람객이 6만5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산될 정도로 흥행 면에서 성공을 거뒀다. 이번 관람객 수는 평소 유사 규모 전시 대비 2배가 넘는 수치다. 마틴 루터 킹 데이 연휴에는 하루 3500명이 몰렸고, 전시장 입구의 '달항아리' 재현 기념품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이건희 컬렉션
미국 워싱턴 D.C.스미스소니언재단 산하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에 전시된 일월오봉도./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이건희 컬렉션
미국 워싱턴 D.C.스미스소니언재단 산하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에 전시된 '청자진사 연화문 표형 주전자'./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환수'의 이병철, '총체성'의 이건희…대(代)를 이은 수집 철학

전시의 성공적 마무리를 앞두고 지난 22일 열린 '한국의 보물 심포지엄'에서는 이건희 컬렉션의 탄생 배경과 삼성가 2대의 수집 철학이 집중 조명됐다. 기조연설을 맡은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서울대 명예교수)은 이병철 회장의 수집을 '환수(Repatriation)'와 '평온(Peace of Mind)', 이건희 회장의 수집을 '초일류'와 '총체성'으로 정의했다.

김 교수는 "이병철 회장은 1940년대 사업의 격랑 속에서 예술품을 통해 위안을 얻었고, 일본으로 유출된 문화재를 되찾아오는 데 사명감을 가졌다"고 설명했다. 특히 국보 '고려 불화 아미타삼존도'를 일본에서 환수할 당시, 판매를 거부하는 일본인 소장자 몰래 미국인 대리인을 '007 작전'처럼 투입해 기어이 작품을 찾아온 일화는 참석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반면 이건희 선대회장은 부친의 뜻을 이어받으면서도 자신만의 '완벽주의'를 더했다. 김 교수는 "이건희 회장은 비용보다 '질(Quality)'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며 "전문가가 인정하는 명품이라면 백지수표도 주저하지 않는 과감함으로 컬렉션의 수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렸다"고 회고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같은 국보부터 클로드 모네·파블로 피카소·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서양 거장의 작품까지 아우르는 그의 컬렉션은 한국 미술이 동서양 미술사 속에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보여주는 입체적인 '교과서'가 됐다.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이건희 회장이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백남준 선생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다다익선'의 모니터 1000여대 교체를 지원한 일화도 소개되며, 고미술뿐 아니라 현대 예술가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이 다시 한번 확인됐다.

김영나 교수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립중앙박물관장)가 22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마이어 오디토리움'에서 진행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 기념 '한국의 보물 심포지엄'에서 기조 강연을 하고 있다./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이건희 컬렉션
2025년 12월 1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재단 산하 국립아시아예술박물관(NMAA)에서 진행된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의 보물: 모으고, 아끼고, 나누다(Korean Treasures: Collected, Cherished, Shared)' 기념 리셉션 모습./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 '기증의 혁명'…사유재, '공공의 지식 인프로'로 승화

갈라 만찬 참석자들과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전시의 진정한 가치가 '기증'에 있음을 한목소리로 강조했다. 스콧 상원의원은 "이번 순회전은 한미동맹이 공유된 가치를 토대로 구축됐음을 상기시킨다"고 했고, 앤디 김 의원은 "미국인들이 삼성가가 가져온 소장품을 관람할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윅스 회장도 "삼성 일가의 열정이 전 세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평했다.

김영나 교수는 강연에서 "기증은 컬렉션을 개인의 '사유재'에서 사회의 '지식 인프라'로 바꾸는 혁명적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그녀는 2028년 서울 송현동에 들어설 '이건희 기증관'에 대해 "단순히 유물을 보여주는 창고가 아니라, '한국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학술과 문화의 플랫폼이 돼야 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 워싱턴에서 시카고·런던으로…계속되는 '이건희 컬렉션'의 여정

워싱턴 D.C.에서 피어난 '이건희 컬렉션'의 불꽃은 이제 미국 중부와 유럽으로 옮겨붙는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협력으로 오는 3월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9월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으로 이어진다.

체이스 로빈슨 NMAA 관장이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K-팝 데몬 헌터스'를 언급하며 "이제 젊은 세대는 조선의 '일월오봉도'를 보며 한국의 역사를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듯, 이건희 컬렉션은 과거의 유물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28일 밤, 예술산업관을 가득 메운 갈라 만찬의 열기는 이재용 회장이 언급한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굳건한 의지"가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삼성가의 '문화보국' 정신은 이제 워싱턴을 넘어, 시카고와 런던, 그리고 전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한국 미학의 독창적인 DNA를 심는 거대한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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