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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당한 감정’… 독일과 미국의 고통스러운 소원함과 대서양 동맹의 해체 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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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2. 10. 13:10

메르츠 총리 "팍스 아메리카나, 끝나...유럽, 미국서 독립해야"
전 주미 독일대사 "이라크 전쟁 때 이미 경고 신호"
독일인 71%, 미국을 '적' 인식...독일, 미지의 영역으로
트럼프 메르츠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왼쪽)가 2025년 6월 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독일 태생인 그의 할아버지 프레데릭 트럼프(독일 이름 프리드리히 트럼프)의 출생증명서 사본 액자를 보여주고 있다./로이터·연합
최근 독일과 미국 사이의 정서적 유대가 풀리며 양국 관계가 '고통스러운 소원함'으로 변했고, 독일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두고 '배신처럼 느껴진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고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가 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FT는 한때 대서양 동맹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독일 내 커뮤니티(공동체)가 혼란에 빠졌고, 수십 년간 이어온 안보 질서가 풀리듯 해체되고 있다고 전했다.

◇ 전 주미 독일 대사, 평생의 유대 뒤에 가려진 균열 "어쩌면 이라크 전쟁 때부터 시작된 이별"

볼프강 이싱거 전 주미 독일대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에 가한 반복적인 공격 이후, 미국의 유럽 이탈에 대한 초기 경고 신호가 20년 전 이라크 전쟁 당시 이미 나타났던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다고 말했다.

13일 개막하는 사흘 일정의 뮌헨안보회의(MSC) 의장을 맡고 있는 이싱거 전 대사는 미국이 유럽을 '신·구(new·old)'로 나누며 내부 분열을 시도했던 장면을 회고하며 "어쩌면 그때부터 걱정을 시작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은 이라크 전쟁에 동참한 국가들을 '친구'로, 독일과 프랑스를 '견해를 공유하지 않는 국가'로 구분하는 구도를 제시했다고 그는 지적했다.

이싱거 전 대사는 미국이 국제법을 공개적으로 경시하는 태도가 동맹의 결속력에 훨씬 더 큰 도전을 제기한다며 대중이 미국을 적대적인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면 이 관계는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트럼프 유럽 정상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왼쪽부터)··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마르크 뤼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사무총장 등이 2025년 8월 18일 오후(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우크라이나 종전 방안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AP·연합
◇ '평생의 유대'와 현재의 단절

이 같은 이싱거 전 대사의 우려는 그가 미국과 맺어온 평생의 인연과 대비되며 더욱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그의 미국과의 인연은 16세 때 일리노이주 이로쿼이 카운티의 소도시 왓세카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미국 외국 교환 프로그램을 통해 고등학교 마지막 해를 보냈고, 1963년 11월 존 F. 케네디 당시 대통령 암살 당시 집의 흑백 텔레비전에 며칠간 붙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싱거 전 대사는 이를 미국과 글로벌 정치, 그리고 드라마를 처음 접한 인생을 형성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독일의 전후 민주주의 기초를 놓았고 거의 80년 동안 안보를 보장해 왔다는 인식을 공유해 온 세대에 속한다. FT는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대서양주의자 커뮤니티가 흔들리고 있다고 전했다.

GULF-GERMANY/SAUDI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왼쪽)가 4일(현지시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로이터·연합
◇ 수치로 드러난 대미 신뢰 붕괴

FT는 독일 내 미국에 대한 인식 악화가 여론조사로도 확인된다고 보도했다. 퓨리서치센터와 쾨르버재단이 실시한 지난해 12월 조사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좋다'고 평가한 독일인은 27%에 불과했다. 이는 전년 4분의 3에 달했던 긍정 응답에서 급락한 수치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그린란드 점령 가능성을 언급한 뒤 실시된 포르사 여론조사에서는 독일인의 71%가 미국을 파트너가 아닌 적대자로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FT는 독일인의 대미 관계 인식이 갑작스럽게 악화됐다고 분석했다.

◇ 미군 주둔지에 번지는 불신..."미국, 더 이상 자유 민주주의 국가 아냐"

이 같은 정서 변화는 미군 기지가 위치한 독일 남서부 카이저슬라우테른에서도 감지된다고 FT는 전했다. 이 지역은 람슈타인 공군기지를 중심으로 약 5만명의 미군과 가족, 민간인이 거주하는 곳이다. 베아테 키멜 시장은 "우리는 매우 훌륭한 호스트"라고 말했지만, 주민 스테판 쿱슈는 미국이 더 이상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고 말했다.

FT에 따르면 유럽에 주둔한 미군 8만명 가운데 약 3만7500명이 독일에 주둔하고 있으며, 이는 유럽 전체 미군 배치의 3분의 1을 넘는다. 유럽 각국 관료들은 유럽 주둔 병력의 미래를 좌우할 미국 국방부의 글로벌 병력 준비 태세 검토(Posture Review)를 기다리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젤렌스키 밴스 설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J.D. 밴스 미국 부통령(오른쪽)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025년 2월 28일(현지시간) 미국 백악관에서 설전을 벌이고 있다./AP·연합뉴스
◇ 메르츠 총리의 '팍스 아메리카나'의 종료 선언...전문가 "米, 나토 결속 힘에서 방화 존재 돼...배신감"

독일의 대서양주의자들은 J.D. 밴스 미국 부통령이 2025년 2월 14일 독일 뮌헨안보회의에서 유럽을 훈계한 뒤 우파 독일대안당 지도자 알리스 바이델을 만난 일을 특별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당시 밴스 부통령은 영국과 독일을 직접 거론하면서 이들 국가의 '반민주적 경향'이 러시아의 침략보다 유럽의 자유에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으로 동맹국들에 충격을 안겼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이를 '시대적 파열(epochal rupture)'이라고 지적했으며, 같은 달 총선 승리 직후 연설에서 유럽이 미국으로부터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메르츠 총리는 이어 2025년 12월 "유럽과 독일에게 '팍스 아메리카나'의 수십 년은 대체로 끝났다"고 진단했다.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독일마셜펀드의 클라우디아 마요르 수석부대표는 미국이 전후 독일을 신뢰하고 민주주의를 가르쳤다는 기억 때문에 현재 상황이 더욱 배신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녀는 "미국이 나토의 결속을 유지하던 힘이었는데, 이제는 불을 지르는 존재"라고 비판했다.

◇ 복원과 탈선의 기로에서... 독일이 마주한 "새로운 무언가"

FT는 이날 오피니언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미국의 복원 가능성을 두고 시각이 엇갈린다고 전했다. 동맹국 사이에서는 한때 단지 4년일 뿐이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옛 질서'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됐다고 전했다.

다만 FT는 이러한 통념 역시 재검토할 가치가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가 점점 더 옹호하기 어려워지면서 미국 내부에서 진정한 반발이 마침내 시작됐다는 것이다. FT는 이러한 반발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에 대한 전면적 거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FT는 결론적으로 대서양 관계가 여전히 유동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고 전했다. 이싱거 전 대사는 유럽이 우크라이나 휴전 보장 등을 위해 여전히 미국에 군사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 감정적 소원함과 현실적 필요 사이에서 '진퇴양난(rock and a hard place)'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진단했다.

반면 카스텐 포익트 전 사회민주당(SPD) 의원은 독일이 더 이상 과거의 죄책감에 머무르지 않고, 스스로를 '새로운 무언가'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제 '미지의 영역(uncharted territory)'으로 나아갈 준비가 됐다고 주장했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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