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와 피해자 경계 무너뜨리는 정교한 심리 스릴러
김려원의 억눌린 광기와 권유리의 날 선 생존 본능이 부딪히는 90분
|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국내 초연 중인 연극 '말벌(The Wasp)'은 영국의 주목받는 작가 모건 로이드 말콤의 2015년 화제작이다. 작품은 단순히 과거의 상처를 들춰내는 복수극에 그치지 않는다. 말벌이 거미를 마비시키고 그 몸속에 알을 낳아 유충이 내장을 파먹게 하는 생태적 특성처럼, 과거의 트라우마가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안에서부터 무너뜨리고 괴물로 만드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무대 위 말벌 장식은 이 극의 상징성을 시각적으로 완성한다. 화려하면서도 기괴한 말벌 오브제는 한 번 박히면 빠지지 않는 독침처럼 두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과거의 기억을 형상화한다. 배우 겸 연출가 이항나는 이러한 상징적 미장센과 함께 인물 간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권력 관계를 정교하게 구현해 냈다.
극은 중반부를 넘어설수록 '기억의 비대칭성'을 날카롭게 파고든다. 헤더에게 과거는 어제 일처럼 생생한 지옥이지만, 카알라에게 그것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철없던 시절의 장난"일 뿐이다. 가해자의 망각과 피해자의 집착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불협화음은 극의 긴장감을 극도로 끌어올린다. 특히 말벌이 숙주를 마비시키듯, 경제적 우위를 점한 헤더가 카알라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그녀를 심리적 막다른 길로 몰아넣는 과정은 생태계의 잔혹한 생존 본능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배우들의 열연은 이 팽팽한 심리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헤더' 역의 김려원은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차분한 말투 뒤에 서늘한 복수심을 갈아온 인물을 입체적으로 그려냈다. 순간순간 흔들리는 눈빛과 억눌린 호흡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녀의 고통에 이입하게 만든다. 반면 '카알라' 역의 권유리는 거친 말투와 방어적인 태도로 무대를 휘젓는다. 아이 다섯을 키우며 생존에 매몰된 여성의 피로함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다만 극의 몰입도 측면에서 아쉬움도 남는다. 카알라는 비루한 현실에 찌든 인물이지만, 권유리 배우의 화려한 외모가 배역이 처한 극한의 궁핍함을 시각적으로 상쇄하는 면이 없지 않다. 두 배우 모두 에너지는 넘치지만, 인물들이 가진 트라우마의 심연과 그로 인한 뒤틀린 내면을 더 밀도 있게 보여주는 깊이 있는 연기가 뒷받침된다면 극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연극은 복수의 끝에서 우리에게 묻는다.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니면 폭력의 연쇄가 낳은 또 다른 비극인가. 사회적 계급 격차와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라는 무거운 주제들이 '말벌'이라는 매혹적인 상징 아래 하나로 묶인다. 90분의 러닝타임이 지나고 암전이 찾아올 때, 관객은 마치 말벌에 쏘인 듯 얼얼한 여운과 마주하게 된다. 공연은 4월 26일까지.








![THE WASP(말벌)_사진3[김려원, 권유리] (주)해븐프로덕션](https://img.asiatoday.co.kr/file/2026y/03m/17d/202603150100072990004072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