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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계절, 영혼의 휴식이 되는 絃의 진동을 느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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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객원 기자

승인 : 2026. 03. 30. 16:05

첼리스트 이유민과 떠나는 바로크 시간 여행
이유민 (1)
첼리스트 이유민/ 본인 제공
봄의 문턱을 넘어선 3월의 공기에는 유독 현악기의 잔향이 짙게 배어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기운 사이로, 첼로의 묵직한 울림이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단 기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685년 3월 31일(그레고리력 기준), 음악의 지형도를 영원히 바꾼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생일을 앞둔 이 시기는 연주자들에게도, 감상자들에게도 소리의 근원을 되묻는 소중한 계절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AI)이 선율을 짓고 디지털 음원이 고막을 자극하는 2026년의 오늘, 역설적이게도 음악의 가장 원초적인 뿌리인 '바로크(Baroque)'에 대한 갈증은 더욱 깊어만 간다. 바흐의 생일을 맞아, 현대 첼로와 시대 악기인 바로크 첼로를 동시에 섭렵하며 고음악의 정수를 탐구해온 첼리스트 이유민을 가이드 삼아 우리가 잊고 있었던 '순수한 소리'의 연대기를 추적해 보았다.

바로크 음악을 이해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은 '악기' 그 자체에 있다. 현대의 첼로가 화려한 금속 광택과 날카로운 스틸 현으로 무장하고 거대한 콘서트홀을 압도한다면, 바로크 첼로는 사뭇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첼리스트 이유민은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 화두를 던진다. 그는 바로크 첼로의 가장 큰 특징으로 '결핍이 주는 자유'를 꼽았다. "현대 첼로는 악기 하단의 금속 막대인 엔드핀을 바닥에 박아 고정하지만, 바로크 첼로는 오직 연주자의 양다리 힘으로만 지탱해야 합니다. 지지대가 사라진 자리에는 연주자의 몸과 악기가 하나로 결합하는 밀착감이 들어차죠. 악기를 고정하지 않음으로써 연주자의 호흡에 따라 첼로가 미세하게 요동치는데, 이것이 바로 바로크 음악의 핵심인 유연한 리듬감의 원천이 됩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구조적 차이가 음악의 전개를 완전히 바꾼다는 것이 이유민의 설명이다. 여기에 양의 내장을 꼬아 만든 '거트(Gut)현'이 더해지면 소리는 비로소 입체적인 질감을 얻는다. "매끄럽게 가공된 현대의 소리와 달리, 거트현은 활이 닿는 순간 특유의 마찰음과 함께 서걱거리는 인간적인 숨소리를 내뱉습니다. 완벽하게 정제된 소음이 아닌, 생명력이 살아있는 날 것의 울림이죠. 습도와 온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끊임없이 튜닝을 요구하는 거트현의 예민함이야말로, 우리가 기계적인 완벽함에서 벗어나 음악과 실시간으로 교감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이유민 (2)
거트현의 울림에 집중하는 첼리스트 이유민. 현대 악기와 달리 예민하고 투박한 바로크 첼로의 음색을 끌어내는 그의 활질에는 고유의 수사학적 호흡이 담겨 있다. / 본인 제공
이러한 악기적 이해는 자연스럽게 첼로의 성서라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조곡으로 이어진다. 많은 이들이 이 곡을 수학적 구조물로만 인식하며 딱딱한 연습곡처럼 대하곤 하지만, 전문가로서 이유민이 제시하는 해법은 명확하다. 바로 '음악적 수사학(Rhetoric)'의 복원이다. "바흐 시대의 음악은 곧 말(Speech)과 같았습니다. 문장에 주어와 동사가 있고 쉼표와 마침표가 있듯 음악도 청중에게 말을 건네야 합니다. 바흐를 연주할 때 악보에 적힌 음표를 물리적인 높낮이로만 보지 말고, 그 속에 숨겨진 질문과 대답을 찾아내야 하죠. 바로크 활은 현대의 활과 달리 끝으로 갈수록 가벼워지는 아치형 구조를 띄는데, 이 도구를 손에 쥐었을 때 비로소 바흐가 의도한 강약의 미묘한 뉘앙스와 분절이 자연스럽게 구현됩니다. 인위적으로 누르는 소리가 아니라, 활이 현 위에서 춤추듯 대화하는 소리가 바로 바흐가 꿈꾸던 이상향이었을 겁니다."

이유민이 바흐의 생일을 기념한다는 것이 단순히 바흐의 곡을 연주하는 차원을 넘어 바흐가 세상을 바라보았던 정밀하고도 따뜻한 시선을 소리로 복원해내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이유민과 함께 바흐의 악보를 들여다보면 단순해 보이던 아르페지오가 하나의 거대한 담론으로 변모한다. "바흐의 곡에는 신을 향한 경외심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고뇌와 환희가 공존합니다. 바로크 첼로로 그의 곡을 켤 때면, 3세기 전 라이프치히의 차가운 교회 공기가 제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곤 해요. 그것은 악보라는 평면적 기호를 입체적인 감각으로 치환하는 고고학적 탐구와도 같습니다."

이유민 (3)
지지대 없이 양다리로 악기를 지탱하는 '엔드핀 없는 자유'. 첼리스트 이유민이 바로크 첼로로 시대 음악의 원형을 재현하며 본질의 소리를 찾아 나서고 있다. / 본인 제공
최근 이유민이 창단한 'Trio sf'의 행보 역시 이러한 바로크적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다. 멘델스존과 브람스를 연주했던 지난 창단 연주회는 표면적으로는 낭만주의 음악을 표방했지만, 그 기저에는 고음악적 소통 방식이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팀명인 'sf'가 상징하는 감각(Sensing)과 감정(Feeling)은 사실 바로크 시대 연주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미덕이기도 하다. "앙상블의 본질은 결국 대화입니다. 바로크 중주에서 각 악기가 서로의 선율을 모방하고 응답하듯, 트리오 연주에서도 상대의 숨소리를 감각하고 그에 맞는 감정을 실어 보내는 과정이 핵심이죠. 우리가 브람스를 연주할 때도 바흐가 강조했던 성부 간의 독립성과 조화라는 원칙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현대 악기를 들고 무대에 서더라도 제 머릿속에는 늘 거트현의 섬세한 떨림과 바흐의 논리적인 구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문가적 시각은 자칫 감정과잉으로 흐를 수 있는 낭만 음악에 절제된 품격과 명료한 구조미를 부여한다. 고음악을 전공한 이유민의 이력이 현대 음악 해석에 있어 독보적인 깊이를 만들어내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이유민은 전북대학교와 서울중부예술영재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테크닉보다 앞서 '소리의 역사성'을 강조한다. "학생들이 바흐의 곡을 단순히 음표의 나열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음표 하나가 3세기 전 어떤 공기를 가르며 탄생했는지, 그 역사적 맥락을 이해할 때 비로소 연주자의 개성이 투영된 진실한 소리가 나올 수 있으니까요."

바흐의 생일 주간을 어떻게 즐기면 좋을까. 이유민은 거창한 전집 감상보다는 소리의 공간감에 집중해볼 것을 제안했다. "바흐의 음악은 거대한 홀보다 적막한 방 안에서 나 자신과 마주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스마트폰의 전원을 잠시 끄고, 첼로의 가장 낮은 현이 내는 진동이 방 안의 공기를 어떻게 바꾸는지 느껴보세요. 눈을 감고 그 소리의 결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음악이 단순한 청각 정보를 넘어 영혼의 휴식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유민의 제안은 마치 바쁜 현대인을 향한 예술적 처방전처럼 들린다. 바로크 음악은 결코 낡은 옛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아름다움으로 돌아가는 가장 정교한 지도다. 거트현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음으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길을 잃지 않을 단단한 마음의 울림을 얻게 될 지 모를 일이다.
전형찬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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