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국립 스테인벡 센터의 해질녁 풍경 | 0 | | 살리나스 시내 중심부에 위치한 국립 스타인벡 센터의 아름다운 해질녘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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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태양 아래, 끝없이 펼쳐진 상추밭과 포도밭이 초록빛 바다처럼 일렁인다. '세계의 샐러드 그릇'이라 불리는 인구 15만의 도시 살리나스(Salinas). 이곳은 미국의 대문호 존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고향이자 그의 문학적 영혼이 깃든 곳이다. 오늘은 살리나스 다운타운, 메인 스트리트 1번지의 거대한 기억의 저장소, 국립 스타인벡 센터(National Steinbeck Center)를 찾아간다.
이 공간이 대도시가 아닌, 농업 도시 살리나스에 자리 잡은 것은 지극히 필연적이다. 스타인벡에게 살리나스는 단순한 출생지가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창(窓)이자, 그의 문학을 잉태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 '에덴의 동쪽', '생쥐와 인간', '분노의 포도' 등은 모두 살리나스 계곡과 캘리포니아 주변 풍광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생전에 그는 늘 "이 계곡의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땀냄새를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가 고향을 떠나있었을 때도, 그의 펜 끝은 언제나 살리나스의 흙을 향해 있었다. 이런 이유만 보더라도 1998년에 문을 연 이곳은 작가만을 기념하기 위해서 조성된 공간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동쪽의 빛과 생명'으로 묘사된 '가빌란산맥'과 '살리나스강'이 보이는 바로 그 자리에, 소설 속 인물들이 걸어 다녔던 바로 그 거리에 세워짐으로써 문학적 진실성을 갖게 된 것이다. 스타인벡을 사랑하는 방문객들은 이곳을 관람한 후, 밖으로 나와 마주하는 거리와 들판이 바로 소설의 배경임을 알고는 가벼운 전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 존 스타인벡 벽화 | 0 | | 1998년 지역예술가들이 함께 작업한, 존 스타인벡의 '시각적 전기'로 평가받는 벽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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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작가들의 문학관이 대개 작가가 살던 '생가'를 보존하여 그의 개인적인 삶과 가재도구 등을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면, 스타인벡 센터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 물론 센터 인근, 걸어서 약 3~5분이면 갈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스타인벡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곳은 '문학적 테마파크'이자, '사회학적 아카이브'에 가깝다. 스타인벡의 삶을 연대기 순으로 나열하기보다, 그의 작품이 던지는 거대한 질문들을 주제로 공간을 구성했고, 전시관은 마치 연극 무대처럼 꾸며져, 관람객은 단순히 유리를 통해 원고를 들여다보는 관찰자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참여자가 된다. 예를 들면, '분노의 포도' 섹션에서는 대공황 시절 이주노동자들이 겪었던 텐트 생활과 낡은 트럭의 질감을 시각적, 청각적으로 살려, 관람객은 그곳에서 당시의 먼지 바람 소리를 듣고, 노동자들의 거친 숨소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은 작가가 평생 매달렸던 '인간의 존엄성', '노동의 가치',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주제를 체험케 하려는 의도로 보였다. 여느 문학관들이 '작가'를 보여준다면, 스타인벡 센터는 적어도 내게는 작가가 바라본 '세상'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캠핑카 ‘로시난테’ | 0 | | "찰리와 함께한 미국 여행"을 다룬 섹션에 전시되어 있는 캠핑카 '로시난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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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이 느끼는 감정은 '존경'보다는 '연민'과 '성찰'에 가까웠다. 화려한 문학적 수사가 아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던 스타인벡이었기 때문에, 관람객들은 전시를 보면서 사회의 빈곤, 이주민 문제, 그리고 인간 소외를 떠올린다. 많은 방문객들이 '박물관을 나설 때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까닭은 1930년대의 오키(Okie: 대공황 시절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농민)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빈곤층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되기 때문이다. 문학이 어떻게 사회를 고발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목격한 사람들은 나름 내면의 변화를 겪으며 전시실을 나서게 되는데, 이게 바로 국립 스타인벡 센터가 가진 큰 힘이 아닐까.
스타인벡의 육필 원고, 타자기, 초판본 등 4만점 이상의 센터 소장품 중에서도 가장 의미 깊고, 방문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유물은 바로 '로시난테(Rocinante)'라 생각했다. 로시난테는 스타인벡이 1960년, 반려견 '찰리'와 함께 미국 일주를 떠날 때 직접 개조했던 초록색 GMC 픽업트럭 캠퍼의 이름인데, 돈키호테의 말 이름에서 따온 이 트럭은 그의 여행기 '찰리와 함께한 여행'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 전시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낡고 투박한 트럭 로시난테는 작가 스타인벡의 '진실을 향한 갈망'을 상징한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진짜 미국을 다시 보고 싶다'며 길을 떠났던 노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이 트럭 앞에서, 사람들이 오래 머무는 까닭은 흙먼
지를 뒤집어쓰고 대륙을 횡단했던 이 큰 강철 덩어리가 스타인벡의 문학을 더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 생각했다.
 | 영화 '에덴의 동쪽' 포스터와 1900년대 빈티지 자동차 | 0 | | 영화 '에덴의 동쪽' 포스터와 1900년대 빈티지 자동차로 소설의 시대상을 잘 구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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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인벡 센터는 정적인 공간이 아니다. 지역 사회, 특히 살리나스 커뮤니티와 깊게 호흡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스타인벡의 작품을 토론하고, 영화를 상영하며, 소설 속 배경을 답사하는 '스타인벡 페스티벌', 제2의 스타인벡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청소년 작가 프로그램', 그리고 살리나스 밸리의 역사와 문학을 연결하는 '현장 학습 프로그램'도 활발히 운영된다. 많은 유명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지만, 스타인벡의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그 울림을 전한 인물은 미국의 록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다.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깊은 영감을 받아 앨범 '톰 조드의 유령'을 발표하기도 한 그는 스타인벡 센터가 수여하는 '존 스타인벡 상(賞)'을 받았으며, 그의 헌사는 센터를 방문하는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먹먹했다.
"스타인벡은 단순히 잃어버린 과거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인간애에 대해 썼습니다…. 나는 스타인벡의 목소리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존엄을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스타인벡은 그 싸움 한복판에 있습니다."
국립 스타인벡 센터는 스타인벡의 모든 것을 매우 흥미롭게 재현해 놓은 훌륭한 문학관이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간의 고통과 희망, 그리고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일깨워주는 곳이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스타인벡의 책 한 권을 읽은 것 이상의 무거운 책임감과 뜨거운 감동을 안고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김정학 前 대구교육박물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