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계 공로 보면 후손 입장서 비난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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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불교계의 시선으로 보면 세조에 대한 평가는 조금 달라진다. 세조는 조선의 억불숭유 기조 속에서 불교가 살아남을 수 있게 도운 '호법군주'이다. 서울 종로구 원각사지 십층석탑, 영암 도갑사 해탈문 등 국보는 물론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한글로 번역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 등 보물 모두가 세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세조는 불경을 번역하는 국가기관 간경도감을 설치해 금강경·법화경·능엄경을 일반 백성도 읽을 수 있도록 한글(훈민정음)본으로 만들었다.
특히 강원도 오대산은 세조와 인연이 깊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본사 월정사가 있는 이곳은 신라 자장율사가 선덕왕 10년(636)에 중국의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받은 부처님의 정골사리를 모시고 있다. 월정사 말사인 상원사(신라 705년 창건)는 세조가 1465년 중창 공사를 지원했으며 직접 권선문을 쓰기도 했다. 권선문에는 수양대군 시절 같이 석보상절을 제작한 혜각존자 신미 대사에 대한 깊은 존중과 감사가 담겼다. 세조는 권선문에서 스스로를 '불제자(佛弟子) 조선국왕 이(李)'라고 했을 정도였다.
신미 대사의 추천으로 세조는 병 치료를 위해 상원사를 찾았다. 전설에 따르면 세조는 오대산 계곡에서 목욕하던 중 문수동자(문수보살)를 친견한다. 이 때문이었을까. 상원사에는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이 모셔져 있다. 이 동자상 복장유물로 나온 발원문을 보면 '조선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 12년(1466)에 이 문수동자상을 만들어 모셨다'는 내용이 기재됐다. 세조와 문수보살 신앙은 긴밀히 연결된 셈이다.
세조가 문수보살을 숭상한 것은 통치적 측면으로도 볼 수 있다.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은 성군(聖君)을 상징하는 일종의 '코드'다. 정통성 논란이 평생의 약점이었던 세조 입장에서 문수보살 신앙은 단순한 개인적 신앙을 넘어 대중적인 홍보 효과도 노렸을 것이다. 부친인 세종과 세조 모두 불교에 유화적이었던 것도 조선 초기 민중에게 영향력은 컸던 것은 유교보다 불교였기 때문이다. 통치 이념으로 문수보살 신앙을 활용한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청나라 강희제·건륭제 등은 잦은 중국 오대산 순행을 통해 황제와 문수보살을 연계시키려는 작업을 했다. 한족과 만주족, 몽골족이란 민족 정체성을 뛰어넘는 공통분모인 불교로 통합을 꾀하고 그 정점에는 문수보살의 화신인 황제가 있다는 논리였다.
세조가 어떤 마음으로 불사(佛事)를 했는지 현재의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세조가 남긴 불교문화유산은 대한민국 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제는 세조에 대한 '정상 참작'을 해줄 때도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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