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바티칸과 단교 이후 반세기 만에 베트남서 첫 시복식
교황 레오 14세 특사 타글레 추기경 주례, 7만여명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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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현지시간) 베트남 남부 까마우성에서 프란시스코 쯔엉 브우 지엡 신부의 시복식이 열렸다. 이날 시복 미사는 레오 14세 교황의 특사 자격으로 루이스 안토니오 고킴 타글레 추기경이 주례했다. 껀터교구에 따르면 이날 미사에는 1400여명의 사제와 1000명이 넘는 수도자를 포함해 7만명 이상이 참석했다.
교황청 복음화부의 차관을 맡고 있는 타글레 추기경은 전날 응우옌 호 하이 까마우성 당서기를 만나 "레오 14세 교황을 대신해 베트남 국민들에게 평화의 메시지와 염원을 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면서 "지엡 신부의 시복은 베트남 가톨릭 교회의 큰 기쁨인 동시에 모든 이에게 내리는 축복"이라고 말했다.
지엡 신부는 1897년 남부 안장성의 가톨릭 농가에서 태어났다. 12세에 꾸라오지엥 소신학교(사제양성 중등학교)에 입학한 뒤 캄보디아 프놈펜 대신학교를 거쳐 1924년 사제품을 받았다. 1930년 박리에우성 딱서이 본당의 주임 신부로 부임한 뒤 순교할 때까지 16년간 이 교구를 떠나지 않았다.
지엡 신부는 이 교구에서 주변 마을까지 발품을 팔며 신자와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돌봤다. 일제의 베트남 침략과 겹친 1944~1945년 대기근 때는 교구 논에서 나온 쌀을 주민들에게 나눠주고 북부에서 내려온 피란민에게도 거처와 농지를 마련해줬다.
1946년 전쟁의 혼란 속에서 지엡 신부는 딱서이를 떠나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죽든 살든 교우들 곁에 있겠다"며 거부하고 교회를 지켰다. 프랑스군이 마을을 소탕할 때는 사제복을 입고 성당 앞에 서서 여성과 아이들을 감쌌고, 신자들을 병사로 내보내면 대가를 주겠다는 제안도 거절했다. 껀터교구의 조사에 따르면 지엡 신부는 그해 3월 12일 일본군 탈영병 2명에게 살해됐다.
지엡 신부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공식 조사는 사후 65년이 지난 2011년에야 시작됐다. 교구 차원의 오랜 준비 끝에 착수된 조사였다. 껀터교구는 10여명 규모의 시복조사위원회를 꾸려 베트남·캄보디아·프랑스 등지에서 6년간 자료를 수집했고, 캐나다 출신 교회법 전문가 2명도 조사를 도왔다.
23명의 증인들도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핵심 증인은 지엡 신부와 함께 체포됐다가 풀려난 80대 여성 2명이었다. 껀터교구의 부 반 하이 신부는 "증거들을 종합하면 지엡 신부가 교우를 보호하다 체포돼 대신 죽은 것으로 확인된다"고 밝혔다. 수만 쪽에 달하는 조사 보고서는 2017년 바티칸으로 넘어갔고, 7년 뒤인 2024년 11월 25일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순교 인정 칙서에 서명하면서 마침내 시복의 길이 열렸다.
바티칸이 아닌 베트남 땅에서 처음으로 열린 이번 시복식에는 양국 관계가 응축돼 있다. 베트남은 1975년 공산정권 수립 직후 바티칸과 외교 관계를 끊었다. 당시 정권이 바티칸이 식민 지배 세력인 프랑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1990년 양측이 처음 대화를 재개했고, 2009년에는 양국 차관급이 공동 의장을 맡는 합동실무단이 출범했다. 바티칸은 2011년 비상주 교황청 대표를 하노이에 파견한 데 이어, 2023년 7월 보 반 트엉 국가주석의 바티칸 방문을 계기로 상주 대표부 설치에 합의했다. 같은 해 12월에는 마렉 잘레프스키 대주교가 베트남 상주 교황사절로 임명됐다.
올해 4월 쩐 타잉 먼 베트남 국회의장이 바티칸을 찾아 레오 14세 교황을 알현하고 또 럼 당 서기장 겸 국가주석의 친서를 전달했다. 12차례의 협성과 30여년의 대화가 시복식이라는 행사로 결실을 맺은 셈이다. 인구 약 1억명의 베트남에선 약 700만명이 가톨릭 신자다.
시복식 전날 타글레 추기경을 접견한 응우옌 호 하이 까마우성 당서기도 "시복식은 가톨릭 교우만의 기쁨이 아니라 까마우 주민 모두의 기쁨"이라며 당국이 행사 지원에 적극 나섰음을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