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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죽음충동’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칼럼]‘죽음충동’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기사승인 2020. 11. 25.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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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영화 ‘델마와 루이스’(리들리 스콧 감독 연출, 1991년 작)의 엔딩신은 강렬하다. 막다른 절벽, 그들은 기어이 액셀을 밟아 절벽으로 질주한다. 공중부양 후, 프리즈쇼트로 멈춰 선 컨버터블에 반쯤 기댄 채 절규보다 더 처절한 환호를 외치던 델마와 루이스의 모습은 우리의 영혼을 강탈하기에 충분하다.

델마와 루이스는 유폐와 같은 일상을 뒤로하고 호기롭게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의 건강한 일탈은 가부장적 시선이 확장된 세상의 폭력에 그대로 노출돼 버린다. 폭력에 대한 정당방위는 인정되지 않고, 살인용의자가 되어 떠나야하는 길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이제 그들은 그네들이 감내하기엔 끔직한 도주의 선을 따라가게 된다.

때론 멋지게 FBI의 추격을 따돌리기도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도주 자금을 도둑맞게 되고 급기야 강도행각까지 벌이게 된다. 가정과 직장이라는 규범을 떠난 그녀들을 세상은 가만두지 않는다. 그들이 선택해야할 길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 영화의 마지막, 그녀들이 허공을 향해 질주한 이유다.

사실 이 영화는 정신분석학의 모델로 해석이 가능한 로드무비의 정형을 따르고 있다. 남성버디 대신 여성버디가 출현한다는 점을 빼면 장르의 규칙에 충실한 작품이다. 매우 이성적인 주인공과 또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이드(ID)에 충실한 또 한명의 주인공이 함께 여행을 떠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변화하는 과정은 전형적이다. 다만 그녀들의 변화는 서로가 서로를 닮아간다는 점에서 차별화돼 있다. 이러한 캐릭터간의 교차와 접점은 그들이 각각 모자를 갖게 되는 장면을 통해 구현된다.

이성적이지만 트라우마를 마주하고 폭발해 버린 루이스, 순진한 듯 보이지만 내면의 폭발적 에너지를 감춘 델마. 전자는 자신의 반지와 귀걸이를 빼서 길가의 노인에게 카우보이모자를 산다. 반면 후자는 38구경을 쏘아 탱크로리를 폭발해 버리고 희롱을 일삼던 운전자에게 캡 모자를 빼앗는다. 방법은 다르지만 그들은 마침내 사회적으로 규정된 젠더의 틀을 벗어던지고 중성화된 모습으로 서로를 모방하며 닮아간다.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더 그녀들이 설자리는 없어져 간다. 불쾌로 점철된 세상은 그 고리를 끊어야 할 대상이 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우울을 자기애 단계로의 회기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궁극적으로 죽음충동에 이른다고 진단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인공들의 마지막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해야 한다. 영화가 그리는 마지막을 액면 그대로의 죽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최근 90년대 생 젊은 여성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보고되고 있다. 심각한 통계지표는 경악할 수준이다. 4차 산업으로 포장된 자동화와 현재 코로나19 사태로 청춘들은 소속감을 잃어간다. 과거 20대의 사회적 독립은 이른 결혼과 구직으로 이루어졌었다. 부모를 떠나 새롭게 꾸린 가정 그리고 직장동료와의 유대감을 통해 소속을 변경함으로써 가능해졌다면, 현재 동일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은 그와 같은 소속감의 상실로 인해 불쾌와 우울을 반복하고 있다.

영화는 인생에 대한 환유로서, 전복적 상징을 통해 상징체계를 극복하는 기재로 사용될 수 있다. 영화의 마지막 신에서 보이는 죽음충동은 일탈이 아닌 탈주로 해석돼야 한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탈주의 선으로서 주체됨의 선언이다. 따라서 그들의 행위를 표상으로서 자살로 받아들이면 오독이다. 연장선에서, 청년들이 도주와 죽음이 아닌 ‘주체되기로서 탈주의 선’을 감행하기 위해선 아이러니컬하게도 소속감이 중요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다.

가능하다면 재원을 마련해 그들에게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교류의 장(온라인도 무방하다)을 만들어주고, 일정한 미팅을 통해 공유한 아이디어를 결과물로 제시하면 급여를 지급하는 방식으로 이뤄져도 좋을 듯싶다. 또 그 결과물이 훌륭하다면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스타트업프로그램의 출발선으로 삼아야 하겠다. 사회적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지금은 무엇보다 청춘들에게 죽음이 아닌 건강한 탈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숨 쉴 공간을 마련해야 할 때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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