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클래식은 그동안 서양 고음악을 주제로 수준 높은 시대연주 전문 음악회를 기획해왔다. 2022년은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인데 팬데믹이 온 세상을 휩쓴 지난 2년간은 예년과 같은 음악회를 개최하기 어려웠다. 다행히도 올해는 수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동의 라이브 공연을 완성할 수 있었다.
지난 3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10주년 무대를 장식한 음악가는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와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였다. 사할린 출신의 레즈네바는 바로크와 고전 오페라 등 고음악으로 분류되는 성악예술에서 발군의 기량을 드러내는 소프라노로 알려져 있다. 2010년 영국 로얄 앨버트홀에서 만 20세의 나이로 화려하게 데뷔한 이래, 다양한 오페라와 음반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1997년 창단한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이름이 말해주듯, 시대악기 연주를 전문으로 하는 바로크 앙상블이다. 단체를 대표하는 하프시코드 연주자 안드레아 마르콘은 이번에 내한하지 않았지만 레즈네바와 함께 정갈하고도 깊이 있는 바로크 성악음악의 진수를 들려주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이날 공연은 비발디 오페라 '주스티노' 서곡으로 문을 열었다. 오케스트라는 섬세하고도 신중한 조율을 거쳐 비발디의 이탈리안 바로크를 장식적으로 그려냈다. 이어서 등장한 레즈네바는 포르포라의 오페라 '시팍스' 중 '파도에 휩싸인 배처럼'을 노래하면서 첫 곡부터 유려한 레가토(둘 이상의 음을 이어서 부드럽게 연주)와 흔들림 없는 멜리스마(가사 한 음절에 붙여진 여러 음의 멜로디)를 번갈아 선보였다.
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의 공연 모습. 제공=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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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율리아 레즈네바의 공연 모습./제공=한화
데뷔한 지 10년이 지난 그의 소리는 초창기보다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20대 초반, 레즈네바의 연주는 뛰어났지만 힘이 많이 들어간 음색이 때때로 무겁고 답답하다는 인상을 줬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그는 발성에 불필요한 힘이 줄어들었고, 유연함과 음악적으로 풍부한 표현력은 더해져 한 단계 성숙한 성악가가 됐음을 알 수 있었다.
긴 호흡으로 비감을 토해낸 그라운의 아리아와 헨델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명료함이 경쾌했던 1부도 나무랄 데 없었지만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2부라고 할 수 있다. 레즈네바와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는 2부 첫머리에 비발디의 오페라 '테르모돈강의 헤라클레스' 중 '산들바람이 속삭이고'를 연주하면서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객석에 선사했다. 특히 레즈네바와 바이올린의 여유롭고 우아한 조주(助奏)는 일품이었다.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도 절제된 화려함으로 비발디와 헨델의 음악을 생동감 넘치게 연주했다. 이어지는 헨델의 오라토리오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와 비발디의 '그리젤다' 역시 레즈네바의 완벽한 기교와 호소력 넘치는 감정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곡들로 객석의 기립박수까지 이끌어냈다. 이날 레즈네바와 오케스트라는 3곡 넘는 앙코르로 화답했다. 그중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잘 알려진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를 오라토리오 '시간과 깨달음의 승리' 중 나오는 '가시는 두고 장미를 꺾어라(Lascia la spina, cogli la rosa)' 버전의 가사로 노래한 것이 이채로웠다. 서양음악에서 절대적인 기준이 미처 등장하기 전 자유분방하게 음악을 작곡하고 발표했던 당대를 반영한 흥미로운 시도로 해석됐다.
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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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바로크 오케스트라./제공=한화
레즈네바는 요즘 활동하는 바로크 전문 연주자들 사이에서 다소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프라노로서는 상당히 어둡고 묵직한 빛깔의 중저음을 지니고 있고, 메조소프라노라기에는 고음 부분의 음색이 공기 중에 흩날리는 솜사탕과도 같은 느낌이라 그 성격을 확실히 규정하기가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레즈네바는 비발디나 헨델 등 바로크 오페라의 전문가수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데뷔에서 보이는 것처럼 로시니의 오페라에서 고유한 매력을 더욱 발산한다. 탄탄한 호흡을 바탕으로 한 탁월한 완급조절이라든가 거침없는 패시지의 처리, 뚜렷이 대비되는 감정표현 등을 보면 오로지 바로크 오페라만을 위한 성악가 같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대로, 소프라노와 메조소프라노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음색과 성량을 듣고 있노라면 로시니가 사랑했던 당시 벨칸토 오페라 여주인공들의 음악이 바로 이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이날 공연에서는 바로크 오페라 레퍼토리에 집중해 로시니 오페라 아리아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로크에서 모차르트, 로시니를 넘나드는 그의 무궁무진한 매력과 가능성은 엿볼 수 있었다.
바로크는 악기가 인간의 목소리와 본격적으로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기 시작한 시대다. 이날 공연은 이러한 바로크의 음악적 모색을 생생하게 되살린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