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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때]‘평화의 상징’ 마하트마 간디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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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은 기자

승인 : 2015. 01. 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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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30일 오늘은 임신 7개월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서 귀가하던 길에 뺑소니 차량에 치여 숨진 이른바 ‘크림빵 뺑소니’ 사건의 운전자가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피해자 아버지는 경찰서를 방문해 오히려 자수해줘서 고맙다며 용서의 손을 내밀어 모두를 뭉클하게 만들었는데요.

그렇다면 과거 ‘오늘’은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요?

1948년 이날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가 인도 뉴델리에서 반(反) 이슬람 극우파 힌두교도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향년 79세. 간디는 1947년 7월 인도의 분할독립으로 힌두 및 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져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에 이어 뉴델리를 방문 중이었습니다.

1869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습니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습니다. 일등칸 표를 끊어 기차에 오른 간디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 역무원과 경찰관에 의해 기차 밖으로 끌려 나왔는데요. 이 사건은 그에게 남아공에 사는 모든 유색인종들에 대한 차별임을 각인시켰습니다.

부당한 처우를 받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기로 결심한 간디는 남아공에서‘사티아그라하’(진실관철투쟁)를 전개했고 세 차례의 투옥에도 굴하지 않고 인도인들에 대한 차별법을 폐지시키며 정신적 지도자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평화사상뿐 아니라 왕성한 실천을 통해 인도인 뿐 아니라 20세기 이후 인류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1637년 이날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와 왕세사가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 홍타시에게 항복했습니다.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조선의 치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1972년은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구교도 시민 13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009년 북한이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를 긴장관계로 몰아가고 있다며 한국정부와의 군사, 정치적합의를 모두 무효화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한편 2010년 이날‘꺼벙이’를 탄생시킨 원로만화가 길창적 화백이 별세했고, 국악학 선구자인 이혜구 선생도 별세했습니다.
이재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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