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불리는 마오쩌둥(毛澤東)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린다. 한쪽에서는 ‘현대 중국의 아버지’라고 극찬하는가 하면 비판하는 쪽에서는 ‘권력욕의 화신’이라고 욕을 한다. 하지만 신중국의 탄생에 기여한 공로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정한다. 매년 그의 생일인 12월 26일이면 고향인 후난(湖南)성 사오산(韶山)에 추모객들이 대거 몰리는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닌가 보인다.
마오쩌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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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에 대한 추모 열기로 뜨거운 후난성 사오산. 일단의 시민들이 그의 동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제공=중국신문.
탄생 122주년이 되는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오산 일대가 전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현지 주민들의 그에 대한 추모 열기로 후끈거린 것. 중국의 반관영 통신인 중국신문(CNS)의 26일 보도에 의하면 최소한 수만 명이 모여 그를 기린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가 죽어서 신이 됐다는 얘기가 크게 과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유가 아닌가 싶다.
물론 젊은 층의 그에 대한 무관심을 상기하면 이런 평가가 다소 과하다고 할지 모른다. 또 점점 추모 열기와 규모가 줄어드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완전히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하다.
그는 주지하다시피 1913년 후난성 창사(長沙)의 제1사범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1918년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혁명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그가 1921년 상하이(上海)에서 열린 공산당 창당 대회에 참석하면서부터였다. 1949년에는 드디어 장제스(蔣介石)가 이끄는 국민당 정권을 몰아낸 다음 이른바 신중국의 국가 주석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대약진운동 실패로 대변되는 경제 정책의 실수, 교조주의적 노선에 대한 반발 등이 잇따르자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중국 현대사 최대의 비극이자 그 자신의 가장 큰 과오로 꼽히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1976년 9월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내년이 그의 타계 40주년이 되는 셈이다. 내년 9월 그를 기리는 행사가 많이 준비되고 있는 것은 이런 상징성을 감안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