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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그의 이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광둥성 바오안(寶安)현 출신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혁명에 경도돼 군인이 되기를 꿈꿨다. 19세 때는 황푸군관학교의 광저우(廣州) 옌탕(燕塘)분교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이후 자연스럽게 공산당의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 참가했다.
그는 군인치고는 해외 경험도 많이 했다. 1950년에 베트남에 파견돼 후치민의 군사 고문으로 활약한 다음 4년 후에는 인도네시아의 중국 대사관에서 영사로 일했다. 이처럼 군인 출신인 그가 금융인으로 변신하게 되는 계기는 교통부의 외사국 국장으로 일하던 78년에 찾아온다. 홍콩의 금융업계 시찰을 떠났다 금융 사업에 눈을 뜬 것. 묘하게도 이 무렵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개혁, 개방 정책도 추진됐다. 이때 이미 선전으로 이주했던 그로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금융 사업에 투신할 전기를 잡은 셈이다.
환갑이 넘은 나이였으나 이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광둥성 일원의 금융 사업을 거의 혼자 힘으로 일궈냈다고 해도 좋았다. 그가 이후 ‘선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린 것은 다 이유가 있지 않나 싶다. 지금 광둥성 곳곳에 붙어 있는 “시간은 돈, 효율은 생명이다.”라는 구호가 그의 작품인 것은 이로 보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다. 그는 그러나 중국 금융업을 일으켜 세운 대부였음에도 개인 재산은 거의 남기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마도 생의 마지막까지 혁명 정신을 유지한 1세대의 당 원로였기 때문에 가능한 무소유의 실천이 아니었나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