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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성(聖)과 속(俗)이 동시에 배치되어 금욕적인 느낌과 동시에 부를 과시하는 욕망이 충돌한다. 아울러 해석에 따라 죽음과 탄생이 양가적인 방식으로 공존하고 있다. 한편 그림 중앙의 거울 속에 화가 자신을 그려놓았다. 게다가 그 위 벽면엔 '얀 반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는 문구까지 적혀있다. 생각해보면 곤혹스럽다. 짐짓 초상화가 품어야 할 덕목을 배반하고 작가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도발을 시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은 북유럽 르네상스 작품으로 범주화된다. 당시 기존의 템페라 물감을 대체한 유화를 이용해, 에이크는 대상을 여러 번 겹쳐 그림으로써 깊이와 동시에 현실을 그대로 담아 놓은 듯한 세밀한 표현으로 압도적인 화면을 창조해냈다. 기술면으로 보나 내용상으로 보나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라는 데는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중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세기 초, 위대한 문화사학자로 후대 사가에 많은 영감을 준 요한 하위징아는 그의 저서 '중세의 가을'에서 14, 15세기를 르네상스의 태동기로만 보지 않고 중세의 시대적 분위기가 쇠락함과 동시에 끝으로 강렬한 흔적을 남긴 시기로 보았다. 마치 가을이라는 짧은 절기, 낙엽이 지기 전에 화려하게 자신을 뽐내는 단풍처럼, 나무들이 새로운 시기를 맞이하기 위해 스스로 절멸해 가면서도 옛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지막 한숨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을 집필하기에 앞서 원래 계획은 역사학자로서 1400년대 전후, '부르고뉴의 세기'를 다루고자 했다. 부르고뉴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프랑스 동북부 지방에 있었던 중세 시대 공국이다. 138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프랑스 왕으로부터 영토를 하사받은 부르고뉴 공가는 세를 확장하고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이후 50여 년의 격변기를 거치며, 부르고뉴공국은 프랑스 왕가와 대립 관계에 놓이게 된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이때 부르고뉴 공가는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공국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가는 교묘한 외교정책으로 부르고뉴공국과 강화조약을 맺는다. 이로써 프랑스 왕가는 부르고뉴 공국의 독립을 막고, 부르고뉴 공가를 프랑스의 사법권 아래에 두고 통제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20세기 초에 연구 대상으로 호출한, 네덜란드 역사가 하위징아의 관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가 '중세의 가을'을 출간한 해는 1919년인데, 1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당시, 조국인 네덜란드가 생존을 위해 전쟁 중에 독일과 영국 사이에서 중립국이라는 포지션을 취하며 외교적 총력전을 벌인 것과 비교연구의 차원에서 14, 15세기의 부르고뉴 공국을 소환했다고 봄이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하위징아는 최초의 관심을 넓혀 부르고뉴 공국과 프랑스 왕국의 문화사를 섬세하게 살펴보고 북유럽 르네상스 초기에 억압적 교회 권력과는 궤를 달리하는 일상에 민중의 중세가 반짝거렸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그는 후속 연구를 지속하고 마침내 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호모 루덴스'를 저술하게 된다. '놀이하는 인간'으로 번역되는 이 개념은 문화 속의 놀이가 아닌 문화 자체로서 놀이에 천착하고, 인간의 본질이 바로, 이 놀이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대로 인식하던 중세에도 민중은 축제와 놀이를 통해 시대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억압의 체제에서도 평등을 지향하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정서적인 저항을 멈추지 않았음을 역설한다.
연일, 21세기의 대한민국이라 믿기에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식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작금의 뉴스가 전하는 보도는 퇴행적이다 못해 초현실적이기까지 하다. 우리는 지금 군국주의 식민 통치의 잔재가 마지막으로 스스로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 말하자면 중세의 가을이 아닌 부정적인 의미로서 중세의 겨울쯤을 관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4월은 절기상, 봄비가 내리는 곡우(穀雨)의 계절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