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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용은 금융의 핵심이자 근간이라고 한다. 돈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원활히 흐르기 위해서는 '빌리고 갚는다'는 원칙이 지켜져야 하기 때문이다. 신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카드로 당장 지불하지 않고도 물건을 살 수 있으며, 대출을 통해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결국 금융시장 아래에는 '신용 질서'라는 견고한 토대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19일 이재명 정부의 빚 탕감 정책의 윤곽이 드러났다. 자산관리공사 산하에 채무조정기구, 일명 '배드뱅크'를 설립하고, 장기 연체된 무담보 채권을 일괄 매입한다는 구상이다. 대상은 5000만원 미만의 7년 이상 장기 연체된 채권이다. 특히 중위소득 60% 이하로 상환 능력이 없는 취약계층의 채무는 전액 탕감하기로 했다. 정부는 이 정책을 통해 총 16조4000억원 규모의 연체 채권을 매입하고, 약 113만명이 수혜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다.
채무조정을 통해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덜어주겠다는 정부의 취지에는 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에게 재기의 기회를 제공하고, 정상적인 경제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사회 복귀를 돕겠다는 것이다. 취약 차주들이 다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하게 되면 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에 대한 복지 지출도 줄어들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실제로 취약계층의 부담은 여느 때보다 높은 수준이다.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복지조사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의 평균 금융부채는 2015년 약 800만원에서 지난해 약 1380만원으로, 최근 10년간 70% 이상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오는 9월에는 약 50조 원 규모의 코로나19 관련 대출의 만기가 도래한다. 취약계층의 부담이 더욱 커질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구제 방안은 분명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이번 빚 탕감 조치가 채무자의 상환 의지를 약화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향후 미래 채무자들이 무책임하게 대출을 받는 반면, 상환은 소홀히 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다. 이미 채무를 성실히 상환한 이들 사이에서는 형평성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차주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이러한 논란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부 당시에도 청년들의 채무 일부를 탕감해주는 '청년 특례 프로그램'을 발표했다가, 무리한 투자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박근혜·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장기 소액 연체자의 채무를 일괄 탕감하는 방안이 추진됐고, 이때도 성실 상환자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제기됐다.
흔들린 원칙은 곧 금융 소비자들의 피해로 직결된다. '빚을 갚지 않아도 된다'는 인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면 금융사들은 리스크를 우려해 대출 문턱을 높일 것이 분명하다. 나아가 저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아예 제한할 가능성도 있다. 결국 취약계층을 위한 정책이 시장을 왜곡시켜, 오히려 취약계층에게 불이익을 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는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이전 정부들의 한계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정책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빚을 탕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채무자들의 사회 복귀를 실질적으로 도울 수 있는 효과적인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이번 채무조정 정책이 '구제'와 '형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모범적인 사례로 남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