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민 '무상 LLM' 청사진 제시
기술자립 넘어 글로벌 외풍 막는길
대기업·찐 스타트업 역할분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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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의 의지대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건 거대한 실험이 진행되려 하고 있다. 7월 21일까지 참가 신청을 받는 정부 주관의 '독자 AI 파운데이션 모델' 공모전 얘기다. 정부가 경쟁력 있는 AI 기업을 가려내, 이들에게 천문학적 비용을 쏟아부어 연구에 필요한 수천장의 GPU를 무상 지원해주고 대규모 데이터와 인재까지 제공하는 방식의 초대형 프로젝트다. 성공한다면 정부는 전국민들을 대상으로 무상 한국형 LLM(대규모 언어모델)을 제공하게 된다는 청사진이다. 참여 기업도 딥러닝 학습단계부터 쌓아가는 중요한 경험을 통해 크게 성장할 수 있다.
이 싸움에 네이버와 LG, KT와 NC, 업스테이지 등이 컨소시엄을 꾸려 달려들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6개월마다 각종 경쟁을 통해 1개씩 컨소시엄을 탈락시켜 최종 2개의 모델만 남긴다는 계획이다. 15일 차세대 하이브리드 AI, '엑사원 4.0'을 발표 한 LG처럼 각 기업들은 최근 가장 진보된 버전의 LLM을 꺼내들고 출사표를 던지는 중이다.
이미 정부는 국내 AI 업계 최고 전문가들을 요직에 앉혀 이 사업을 관장하게 했다. 전문적이고 날카로운 안목으로 이번 공모에 참가한 컨소시엄의 '옥석'을 빠르고 정확히 가려 낼 거란 관측이 쏟아지는 배경이다. 예컨대 네이버에서 AI를 총괄하던 하정우 대통령실 AI미래기획수석, LG AI 연구원장이던 배경훈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에 대한 얘기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네이버 대표 출신 한성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NHN에서 일했던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까지도 하나같이 내로라 하는 AI·IT 전문가들이다.
이번 사업은 위기감에서 시작됐다. 1990년대 중반, 김대중 대통령은 방한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을 불러 한국의 성장 전략에 대해 묻는다. 여기에 손 회장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브로드밴드"라고 제안했고 그렇게 초고속 인터넷시대를 위한 정부 지원과 투자가 시작됐다. 시대가 급변했지만 일부에선 이메일을 쓰지 못하고, 인터넷 검색 조차 어려워 하는 이들이 수두룩 했다. 문맹에 이어 컴맹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던 시점이다. 2019년 손 회장은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또 한번의 성장키워드를 내놓는다. 답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AI"였다. 초고속인터넷으로 IT 초강국이 된 한국이었지만, 이번엔 액션이 늦었다.
대한민국의 위기감은 컴맹 다음의 'AI맹'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던가. 미래는 디지털화 된 텍스트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이들의 세상이 될 거다. 신약 개발을 더이상 사람이 직접 원료를 섞어가며 시험해 보지 않아도 되고, 법조계에선 수임한 사건과 유사 판례들을 순식간에 뽑아낼 수 있다. 국민들의 일상은 물론이고 산업현장의 생산성과 효율을 '혁신'의 영역으로 인도 할 전망이다.
특히 대학이나 대학원, 또 각종 연구소에서 AI가 만들어 내는 결과물은 우리의 연구문화와 방법론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으로 보인다. 과학기술 연구 속도를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거란 얘기다. 산업 전반의 경쟁력을 넘어 국민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여 줄 단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 LLM을 활용하는 국가와 아닌 국가의 경쟁력이 극명히 갈리기 시작 할 것이란 얘기다.
◇왜 '소버린 AI' 인가… 지금 아니면 시도도 못할 것
'주권을 가진' 이라는 의미의 소버린(Sovereign) AI는 국가 자체의 인프라·데이터, 인력 및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사용해 구축한 AI를 의미한다. 이번 정부의 공모가 그렇다.
정부의 전국민 AI 추진을 두고 일각에선 한국의 'AI 갈라파고스'를 자초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해외 잘 나가는 언어를 사오거나 협업 하는 게 낫지 않느냐. 이미 단위가 다른 천문학적 투자로 성과를 내고 있는 글로벌 LLM과 비교했을 때 우리만의 기술로 간다는 게 무모해 보인다는 의견 등이다.
그럼에도 우리만의 소버린 AI 구축에 나서야 하는 이유가 있다. 업계에서 자주하는 비유가 AI 기술과 핵무기다. 현재 UN 상임이사국은 모두 핵 보유국이다. 이들은 핵확신금지조약(NPT)이라는 제재로 모든 나라의 핵무장을 금지했고, 각종 의사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미 다수의 빅테크를 가진 미국이 특정 인물에 대한 MS 이메일 계정을 차단하는 등 각종 서비스와 플랫폼을 외교안보에 활용, 전략적으로 휘두르는 횡포를 시작했다. 이에 EU는 강력한 소버린 AI 프로젝트를 시작한 상태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이 각국 관세를 놓고 장난치듯 수치를 썼다 지웠다 하는 걸 보면 전 세계가 이용하는 AI 모델은 초강력 전략무기가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대비하기 위해선 우리만의 AI 생태계가 구축돼야 한다. 자동차로 따지면 엔진과 서스펜션, 제동장치와 도장, 타이어까지 그 모든 사이클을 다 할 수 있어야 외부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을 계속 우리 안에서 만들고 갖고 있어야 기술 발전이 일어나고 외부 대응능력도 키울 수 있다.
2019년 일본이 한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규제를 단행 했을 당시에도 국내에선 '소재 국산화' 목소리가 나왔지만, 이와 동시에 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에 세계에서 가장 좋고 가성비 있는 소재와 부품을 써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경쟁력 없는 국산화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의견도 높았다. 하지만 잇따르는 각국의 수출통제와 보호산업주의 기조에 경제를 포함한 안보 영역의 '로컬화'는 필요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최근 한화가 '국방 AI 소버린' 생태계 구축에 나선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어려운 일이지만 대한민국이 500원짜리 지폐 하나로 차관을 얻어 세계 1위 조선소를 탄생 시킬 지, 정통 강호들을 제치고 자동차산업에서 세계 3위를 기록할 지. 최첨단 반도체와 스마트폰에서 왕좌를 거머쥘 지 누가 알았을까. 덧붙여 전세계가 구글에 의존 할 때 우리는 자국만의 검색 포털을 고수하고 성장 시키지 않았나.
또 AI주권은 단순히 기술적 자립을 넘어 문화적, 언어적 정체성을 보호하고 국제 질서에서 발언권을 확보하는 문제와도 직결된다. 이미 해외 거대언어모델들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한국 미술작품에 대해 엉뚱한 설명을 하는 등의 오류가 이어지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에 편입시키는 새로운 방식의 동북공정이 이뤄질 수도 있다. 이제 AI가 학습하고 이용 할 '인류의 흔적'이라 불릴만한 데이터 창고에 우리만의 기록을 쌓아가야 하는 이유다.
강대국들의 AI 주권 굴기가 시작됐다. 지금이 일어서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번진다. 분명히 언젠가 발생 할 외풍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자생하거나 최소한 대안을 만들어놔야 한다.
◇혁신의 주역은 누가 돼야 하나… 세상에 없던 방식 '스타트업' 믿어줘야
2007년 세상엔 없던 폰이 등장했다. 한번도 폰을 만들어 보지 않은 애플이 내놓은 스마트폰 '아이폰'이다. 당시 시장을 지배하던 삼성과 모터로라, LG 등은 기회가 있었지만 나서지 않았다. 애플은 지켜야 할 안방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 시장의 틀을 완전히 부수는 형태의 혁신이 가능했다.
흥미롭게도 글로벌 AI 시장을 주도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스타트업으로 시작했거나 여전히 스타트업적 성격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오픈AI'와 프랑스 '미스트랄 AI'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AI 산업이 다른 산업과 달리 대기업의 기존 프로세스보다는 스타트업의 민첩성과 혁신성이 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내에도 업스테이지 같은 AI 국가대표 스타트업이 있다. 자체 모델 개발경험과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회사다. 최근 차세대 LLM 솔라프로2를 내놓으며 글로벌 프런티어급 모델들에 필적하는 성능을 입증, 한국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평소 김성훈 업스테이지 대표는 다양한 공식석상에서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 이를 위해서는 펀더멘털에 해당하는 모델의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해 왔다.
또 한국 AI 생태계에서는 미국과 달리 역할 분담이 필수적이다. 공모가 컨소시엄 형태로 진행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경훈 LG AI연구원 원장도 "미국은 구글, MS가 엔드 투 엔드로 다 하지만 한국은 규모가 다르니까 역할 분담이 필수"라고 지적한 바 있다.
대기업들이 이끌고 가는 방식 말고 찐 스타트업들이 기술 혁신 방향을 내놓고 대기업들이 협력, 또 인프라와 생태계를 뒷받침하는 역할 분담은 어떨까. 이전에도 대기업들은 수천장의 GPU와 데이터, 어쩌면 인력까지도 동원할 수 있는 힘을 가졌지만 쉽사리 액션을 취하지 못하지 않았나.
그래서 제언한건데, 스타트업에도 기회를 주자. 대기업은 기존 사업 논리에 얽매이기 쉽지만, 스타트업은 새로운 비전을 위해 모인 사람들 아닌가.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의 혁신'을 위해 결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