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차전 선발·7차전 구원, 연장까지 던진 ‘작은 영웅’의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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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울보의 첫 전국대회
야마모토는 1998년 오카야마현 비젠시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연식야구팀 '이베 파워풀즈'에서 야구를 시작한 그는, 지는 것을 참지 못해 자주 울었다. 사람들은 그를 '울보'라 불렀지만, 그 눈물에는 누구보다 강한 승부욕과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부모님은 그런 아들을 억누르지 않고 다독이며 격려했고, 이 따뜻한 정서적 기반은 훗날 그가 시련을 이겨내는 큰 힘이 되었다.
당시 야마모토가 속한 '이베 파워풀즈'는 지역 리그에서도 중위권 팀이었지만, 팀워크가 뛰어났고 기본기를 중요시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포지션 상 2루수로 출발했지만, 송구 정확성과 야구 센스 덕분에 포지션 이동을 자주 했고, 자연스럽게 내야 전체를 소화할 수 있는 유연함을 길렀다. 이 시기의 야마모토는 공을 던지고 노는 시간이 가장 즐거웠다고 회고한다. 야구의 재미를 본격적으로 알게 된 이때가 그의 성장의 초석이 되었다.
중학교 시절엔 '동오카야마 보이즈'에 소속돼 2루수와 투수를 병행했으나, 주목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공식전 등판은 3학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당초 내야수로만 키울 계획이었던 코치진은 그의 제구력과 공의 움직임을 보고 투수로도 병행 기용했다. 야마모토는 큰 소리로 주장하거나 리더십을 발휘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순간에 몰입하는 성격 덕분에 '숨은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허리 통증을 안고 등판한 지역 예선 결승전, 마지막 타자를 루킹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팀을 전국대회로 이끈 장면은 지금도 지도자들 기억에 남는다. 당시 구속은 시속 120km대에 불과했지만, 날카로운 제구력과 스트라이크존을 공략하는 능력은 이미 남달랐다.
하지만 전국대회 첫판에서 홈런 두 방을 허용하며 탈락의 아픔을 겪는다. 군마현 대표팀의 4번 타자에게 내준 홈런은 그의 투구에 있어 큰 교훈이 되었다. 그 패배는 그를 더욱 단련시켰고, 졸업까지 남은 반 년 동안 혼자 불펜에서 피칭 연습을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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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진학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오카야마 출신이던 야마모토는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조 고교로 진학했는데, 이는 모리마쓰 감독과의 우연한 인연 덕분이었다. 그는 다른 선수를 보러 동오카야마 보이즈를 방문했다가 야마모토의 투구를 목격했고, 그의 릴리스 타이밍과 팔 스피드에 주목했다.
감독은 야마모토를 내야수로 입학시켰으나, 잠재력을 확인한 후 곧바로 투수 전향을 권유했다. 그는 3루수 겸 투수로 병행 기용되며 점차 투수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그는 고교 1학년임에도 전국 수준의 팀과의 연습 경기에서 중압감을 이겨내며 삼진을 잡아내 지도자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투수 훈련은 가혹했다. 야마모토는 "그때 '이제 죽었구나' 싶었다"고 회고했다. 캐치볼이 끝나면 러닝 훈련이 이어지고, 야수들은 배팅할 때 투수진은 그라운드를 뛰어야 했다. 러닝 메뉴 중 일부는 하루 10km에 달했으며, 복근·팔굽혀펴기 등 기본 근력 강화 프로그램도 병행되었다. 그는 "다들 배팅하는데 우리만 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며 투덜대기도 했지만, 훈련을 거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야마모토는 팀 숙소에서도 수건을 잡고 셰도우 피칭을 반복하며 릴리스 타이밍을 점검했다.
특히 미야코노조의 훈련은 전통적인 방식과 현대적인 분석을 융합한 점이 특징이었다. 모리마쓰 감독은 투수들의 투구 영상을 매일 촬영해 밤마다 분석했고, 야마모토는 이를 가장 성실하게 복습했다. 그는 "내일의 피칭은 오늘 저녁에 시작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했다. 고교 1학년 여름이 지나자 그의 직구는 시속 130km 중반까지 도달했고, 이후 2학년 봄엔 145km, 여름 대회에선 150km를 넘어섰다. 투구에 감정의 억제와 상황 판단이 결합되면서, 본격적인 제1선발 경쟁이 시작됐다.
이듬해 전국 강호들과의 연습 경기에서는 프로 스카우트들도 야마모토의 볼 끝에 주목했다. 특히 슬라이더의 예리함은 이미 프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고교 3학년 여름, 팔꿈치 통증을 안고 마지막 경기를 던졌으나 고시엔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날 마운드에서의 그는 7이닝 11탈삼진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강판됐다. 경기 후 덕아웃에 앉아 무릎을 꿇고 조용히 고개를 숙인 장면은 지금도 미야코노조 팬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팀은 지역대회 결승에서 0대2로 패했고, 그의 고교 야구 인생은 고시엔의 흙 한 줌도 없이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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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NPB 드래프트에서 오릭스 버펄로즈는 야마모토를 4순위로 지명한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지도자들은 그 이름이 호출되는 순간 "정말 저 아이가?" 하고 놀랐다고 한다. 작은 체구, 내성적인 성격, 평범한 유망주였던 소년은 그렇게 프로의 문을 열었다. 중학교 지도자는 방송을 보다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프로 첫 2년간 그는 주로 롱릴리프와 중간계투로 기용됐다. 하지만 2019년부터 선발 로테이션에 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잠재력을 폭발시켰다. 그는 특히 체인지업과 스플리터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며 좌타자 대응력을 강화했고, 매 시즌 150km를 넘나드는 포심 구속과 커브의 각도 차이로 타자들의 타이밍을 완벽히 무너뜨렸다. 2021년과 2022년 170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등 선발투수로서의 내구성을 입증했고, WHIP와 피OPS 모두 리그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또한 클러치 상황에서의 강심장 면모와 실책을 최소화하는 수비 능력까지 겸비하며 '완성형 투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오릭스가 부진하던 팀에서 리그 정상권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야마모토의 이닝 소화력과 꾸준함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의 맹활약 속에서 오릭스는 2021년부터 퍼시픽리그 3연패를 달성했고, 2022년에는 일본시리즈에서 야쿠르트 스왈로스를 꺾고 26년 만에 일본 챔피언에 올랐다. 특히 일본시리즈 6차전에서 완투승을 거둔 장면은 지금도 팬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된다. 그는 이듬해에도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고, 통산 NPB에서 70승 이상을 거두며 리그 최고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도쿄올림픽과 2023 WBC에서도 일본 국가대표로 활약한 그는, 올림픽 금메달과 WBC 우승을 모두 경험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입지를 굳혔다. 특히 WBC에서는 3경기 등판, 12이닝 1실점으로 팀의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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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겨울, 야마모토는 포스팅을 통해 LA 다저스와 12년 3억 2500만 달러(총 구단 지출은 포스팅 비용 포함 약 3억 7500만 달러)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며 메이저리그에 입성했다. 당시 환율로 약 4,650억 원에 달하는 이 계약은 역대 투수 최고액이었기에 엄청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데뷔 첫 시즌, 그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며 '먹튀'라는 비아냥을 피할 수 없었고, 실망한 팬들 사이에서는 "12년 계약이 악몽의 서막 아니냐"는 탄식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야마모토는 2025년 정규시즌에서 12승, 평균자책점 2.49, 그리고 이닝당 출루 허용률 0.99를 기록하며 명예를 회복하는 대반전에 성공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 특히 월드시리즈에서 그는 전 세계 야구팬들을 홀리는 '미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저스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2승 3패의 벼랑 끝에 몰린 상황, 그는 탈락 위기의 6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하여 승리를 이끈 다음 날, 불과 하루 전 96개의 공을 던진 선발투수였음에도 불구하고 팀 승리를 위해 9회 위기 상황에 자원하여 구원 등판했다. 1사 만루의 절체절명 끝내기 위기를 무실점으로 막아낸 그는, 연장 11회까지 마운드를 지키며 극적인 더블 플레이를 유도해 팀의 5대 4 승리와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완성했다.
현대 야구에서 보기 드문 투혼과 희생을 보여준 야마모토는 결국 월드시리즈에서 3승을 거두는 압도적인 활약을 펼쳤고, 이는 곧 월드시리즈 MVP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의 커브와 스플리터는 현지 언론으로부터 '역사적 지배력'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비현실적 투혼으로 '야마모토 시리즈'를 만들어낸 그는 이제 더 이상 '먹튀'가 아닌 '영웅'으로 불린다.
하지만 수많은 시련과 영광을 겪은 야마모토는 그 모든 성공의 정점에 서서도 스스로의 근원, 그리고 야구를 시작했던 순수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성공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향을 찾는다. 옛 지도자를 만나 인사를 전하고, 후배들의 훈련을 지켜본다. 동오카야마 보이즈 연습장에 나타난 날, 후배들은 숨죽이며 그를 바라보다가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멀찍이 서 있곤 한다. 야마모토가 먼저 다가가 "야, 공 좀 던져볼래?" 하고 말을 건네면, 그제야 아이들은 웃으며 다가간다. "요시노부는 지금도 예전 그 아이처럼 웃는다"는 스승의 말처럼, 그에겐 변하지 않는 중심이 있다. 야마모토 요시노부, 그는 오늘도 순수한 마음으로 야구를 던지는 선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