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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칼럼] 정치적 성공의 비결은 사회과학적 지식이 아니라 철학적 ‘분별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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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11. 0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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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현대 사회과학이 출연하기 2300여 년 전,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의 본질에 관해서 성찰했을 때 그들은 퇴락하는 아테네 국가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랬다. 세인트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사상은 로마제국의 쇠퇴와 멸망의 시기를 우연히도 같이했으며,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이탈리아의 정치적 쇠퇴와 우연히 같이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회와 기독교 군주들의 정치적 이론과 실재의 대조가 깨우친 의식을 괴롭혔던 역사의 시기에 썼다. 보딩의 정치사상은 프랑스 왕들의 새로운 권좌들의 안정화에 봉사했다. 홉스와 로크의 정치철학들은 영국혁명의 유산과 타협을 이루려고 노력했으며,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군주제의 몰락에서 프랑스혁명을 예상했다. 칸트, 피히테, 그리고 헤겔의 정치사상의 지적 기원도 18세기 말 거대한 정치적 전환에 기인했다. 19세기 전반기에 절대주의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그것의 후위전투를 수행하고 사회적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등장했을 때 자유주의와 마르크시즘의 정치철학들이 새로운 문제들과 타협을 이루려고 했다.

사회과학을 이용하여 현실을 정복하는 인간의 능력과 철학적 이론을 이용하여 정치를 이해하려는 욕망 사이에는 역비례 관계가 존재한다. 자기의 정치권력이 쇠퇴하여, 따라서 현실이 자신의 정치적 장악에서 벗어날 위협이 있을 때 인간은 정치세계에 관한 어떤 이론적 이해를 통해 적어도 지적 정복으로 자신감을 가지려고 모색한다. 우리는 이론적인 이해가 행동에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론적 이해가 정치적 행동이 실패한 것, 다시 말해서, 목적에 맞게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한 것을 대신해서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론적 이해는 정치적 행동의 대체로서 봉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론적 이해가 정치적 행위자에게 실패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제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론적 이해가 정치적 행위자에게 그가 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그것은 한편으로 수단과 목적, 비용과 위험 사이의 관계와, 다른 한편으로 이득과 기회를 발견하게 할 수 있을까? 바꾸어 말해서,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행동 사이에 필연적인 기능적 관계가 존재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은 정치학을 포함하여 현대 사회과학에 의해서 긍정적으로 답변될 수 있고 또 현대 사회과학의 존재이유가 바로 그런 긍정적 답변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야심적 사회과학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실제로는 다음 4개의 근거에서 그 답변을 긍정적으로 답변하기 어렵다. 첫째로, 우리 앞에 당면한 문제는 이론적 지식과 성공적인 정치적 행동 사이에 단순히 기능적 관계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하여 이론적인 지식의 증가가 성공적인 정치적 행동에서 상응하는 증가를 가져올 것인지 여부다. 분명히 수단과 목적 사이의 관계에 관한 이론적 지식은 거듭해서 최소한 획득할 목적을 위한 기회들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그런 기능적 관계의 가능성은 그것의 필연성에 이르지 못한다. 이론적 지식과 정치적 행동 간의 필연적인 기능적 관계의 가정은 그것의 함축적 가정을 낳았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의 부족이 필연적으로 이론적 지식의 부족에서 나온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이론적 지식의 부족은 차치하고라도, 진실로 정치적 행동을 좌절시키는 것은 사실적인 지식의 부족, 의지의 부족, 그리고, 패러독시컬하게도, 때로는 이론적이고 실질적인 지식의 과잉,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혜의 부족이다. 역사를 통해 거듭해서 정치적 행동을 패배시키는 것은 사실적 지식의 부족, 즉 자신과 적의 캠프에서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한 단순한 무지였다. 효과적인 관료조직과 정보수집이 정치가의 지식에서 어떤 격차를 잘 메꿀 수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잘못된 정치적 행동의 원천을 전부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지식이 그런 부족을 개선하거나 동시에 악화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 한편으로, 현실의 이론적 구조의 정확한 그림을 제공하는 이론은 사실적 지식의 파편들을 채우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적 확인이 없는 이론적 지식은 이론적 가설을 사실적 지식과 동일시하고 정반대의 사실적 증거 앞에서도 이론적 가설에 집착하는 교조주의(dogmatism)에 빠지게 할 수 있다.

둘째로, 정치적 행동이 필요로 하지만 아주 종종 부족한 것은 이론적이고 사실적 지식뿐만 아니라 가용한 이론적이고 사실적인 지식의 관점에서 행해질 필요가 있는 것을 행할 도덕적 의지다. 특히 민주주의에서 정치적 행위자가 전형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추구하는 목적들의 우선순위와 수단과 목적의 관계에 관한 지적인 권고보다는 수단과 목적의 분명한 선택을 하기 위한 도덕적 지지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목적지에 도달할지에 관한 권고보다는 그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하는 도덕적 목발이다. 그러나 이론은 그런 목발을 제공할 수 없다. 이론과 사실을 동화하는 이성과 행동 사이에는 인간의 의지가 개입한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성이 제안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성은 등불과 같은 것으로 빛을 발하지만 스스로 행동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실질적 행동이란 이론적 생각을 실천으로 투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론적 생각은 행동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행동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두 모두의 경우에 정치적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은 이론 그 자체가 아니라 의지다. 이론은 이 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말해주는 것과는 즉각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정치이론은 이중의 패러독스에 직면한다. 정치에 관한 의미 있는 이론은 정치적 행동을 지향해야만 한다. 정치에 관한 이론적 사고는 어쩔 수 없는 함의로 정치를 위한 사고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규범적 요소를 내포한다. 그것은 정치적 행동에 관련될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관련성은 행위자의 처분에 달려있다. 그 의지의 반작용들은 예측하기가 더 어렵다.

정치의 실용주의적 이론은 예측의 가능성 위에 서 있다. 정부는 리셀리유(Richelieu), 나폴레옹 그리고 비스마르크 같은 정치가들처럼 현실을 정복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별로 없다. 정부들은 국가이익이라고 간주하는 것과 현상(the status quo)이 위협당하는 것으로 보일 때에만 반응한다. 현상은 모두에게 공통적인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개념들을 가진 정부들에 대항하여 방어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에 의해서 통제되지 않는 대중운동들이나 혹은 그런 대중운동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정부들에 대항하는 것이다. 정치는 언제나 어떤 요인들은 알려졌고, 다른 요인들은 추측되고, 또 다른 요인들은 관찰자의 시야에서 완전하게 숨겨진 게임이다. 이제 정치는 상당한 정도로 맹목적인 모험이 되었다. 그리하여 합리적 선택의 가능성으로 의지를 제공할 수 있는 이론은 없다. 그 자신의 감정에 맡겨두면 그 의지는 가장 쉽게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 즉 현상의 방어에서 피난처를 찾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치가는 경험적 세계에 관해 이론적 이해가 가장 필요할 때 자신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 변화가 완성되는 것을 막으려는 원시적 충동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게 된다.

셋째로, 저항하는 의지에 의한 생각과 행동의 분리는 앞서 논의한 것과 정반대되는 여전히 또 다른 패러독스를 증언한다. 그것은 이론의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과잉에 기인한다. 우리는 철학의 시대가 아니라 사회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사회과학은 사회의 세력들, 그리고 특히 정치의 세력들을 이해하고 그 이해를 통해 그것들의 정복을 추구한다. 이 노력은 2개의 주요 자원들에 의해서 육성된다. 즉, 자연과학의 본보기와 통제되지 않고 또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회에서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의 추구에 대한 위협이다. 사회과학이 목표로 하는 것은 정치가들의 의지에 호소하기보다는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각 사회적 문제는 과학적으로 결정된 하나의 합리적 해결책에 의해서 해결될 것으로 가정한다. 그리하여 선택의 불확실성이 정치적 행위로부터 제거된다. 정치적 행위 그 자체가 과학적 해결책의 기술적 적용으로 전환된다. 과거에 권력의 관점에서 정의된 이익의 투쟁이 정치적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 사회과학이 제공해야 할 진리들의 과시로 축소되었다. 물론, 실제 정치의 세계에서 인간은 정치적 문제들을 그것들이 마치 과학적인 문제들인 것처럼 취급할 수 없다. 충돌하는 이익의 압박과 권력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에서 오직 실패를 각오한 경우에만 행위자의 의지를 요구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문화에서 지배적인 과학적 접근의 영향을 완전히 피해갈 수 없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자신의 정치적 문제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해결책들을 제공받으면 그의 정치적 의지는 흔들리고 이익과 권력의 계산에서 나오는 정치적 결정과 과학적 해결책의 연역적 적용 사이에서 반신반의하는 타협 속에서 환상적 안전을 추구한다.

넷째로, 이성, 의지, 그리고 행동 사이의 조화가 여기에서는 의지의 포기로 수립되는 경향이 있지만 진정으로 사태의 질서에서 지배하는 것은 정치적 의지다. 그것은 과학적 이론의 산물이 아니라 지혜의 산물인 의지다. 지혜는 직감력의 선물이다. 정치적 지혜는 현재와 미래에서 다양한 이익과 권력의 성질과 그것들에 대한 상이한 행동들의 영향을 직감적으로 간파하는 능력이다. 건전한 정치적 판단으로 이해되는 정치적 지혜는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예술적 창조성이나 문학적 스타일 혹은 개인의 웅변성과 개성의 힘처럼 자연의 선물이다. 그 자체로서 그것은 본보기, 경험, 그리고 학습에 의해서 심화되고 또 발전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에 의해 그것을 제공받지 않은 사람들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서 습득될 수 없는 것이다.

정신의 독특한 성질로서 지혜의 인정은 오늘날 우리의 문화에서 거의 사라져버렸다. 지혜는 항상 아주 드문 재능이었다. 오늘날에는 그것의 부재가 아주 심하게 느껴지지만 정치적 행위자들은 사회과학의 이론에서 구원을 모색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은 정치적 행위자들의 구세주가 아니다. 오히려 철학자 플라톤이 정치적 행위자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에 관해 누구보다 더 잘 이해했다. 이상적으로 말해서, 왕들이 지혜를 필요로 했지만 반드시 그것을 갖추지 못한 반면에 철학자들은 지혜의 전문적 공급자들이었다. 철학자들과 왕들, 즉 지혜의 인간과 행동의 인간이 우연히 하나가 되는 행위자에게 의존하는 정도만큼 정치적 성공은 보장될 것이다. 여기서 지혜는 고대 아테네의 아리스토텔레스와 근대 18세기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 19세기 프랑스의 알렉스 토크빌(Alexis Tocqueville), 그리고 20세기 프랑스의 레이몽 아롱(Raymond Aron)과 미국의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의 공통된 주장에 있다. 그들에게 정치가의 성공 비결은 곧 철학적 '분별력(prudence)'이다.

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본란의 칼럼은 본지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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