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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12. 04. 12:00

2인극 심리 스릴러 '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원작, 죄책감과 자기혐오가 빚어낸 강렬한 무대
이승훈, 서신우의 팽팽한 심리 격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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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신인류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말하지 않은 이면을 품고 산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꺼내지 않은 기억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은 불가능한 감정일 수도 있다. 연극 '적의 화장법'은 그 감정을 하나의 인격으로 끌어올려 관객 앞에 세워 보이며, 인간 내면의 균열이 어떻게 현실을 흔들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균열은 언제 생기고,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객석에 앉은 관객에게 이 질문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닌 것처럼 다가온다.

이 작품은 벨기에 출신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특유의 독창적인 문체와 기이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노통브의 원작은 이미 문학계에서 인간 내면의 모순을 탐구하는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극본을 맡은 신성우 작가의 촘촘하고 실험적인 구성과 만나 연극만의 독자성을 확보했다.

이 작품의 출발점은 서늘하게 현실적인 인물 제롬이다. 외형적으로는 평범한 회사원이지만 일상의 반복에 갇혀 방향을 잃은 상태이고, 무엇보다 아내의 죽음이 남긴 상실감을 어딘가에 눌러둔 채 살아간다. 호텔 방에서 홀로 조각 케이크로 생일을 축하하는 장면은 그가 처한 고립을 상징한다. 조각은 작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가 억눌러 온 감정은 결코 작지 않다. 무언가를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삶을 바꿀 힘과 용기가 서로 균형을 잃은 사람이 바로 제롬이다.

그가 서 있는 공항이라는 공간은 익숙하고도 낯설다. 누구에게는 떠남을 의미하고, 또 다른 누구에게는 낯선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착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제롬에게 그곳은 자신을 잠시 멈춘 채 시간을 끌어야만 하는 정체의 공간이다. 그때 나타난 인물이 텍스토르다. 요란한 차림과 예의 없는 말투를 한 이 낯선 존재는 처음부터 제롬의 삶에 침투할 듯한 에너지를 지닌다. 아직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제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화는 점차 제롬의 내면 깊은 곳으로 파고들며 현실과 감정의 경계를 흐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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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신인류
텍스토르의 눈빛과 목소리는 제롬이 애써 외면해 온 감정을 조금씩 꺼내 놓는다. 그 대화 속에는 의심과 유혹, 조롱과 사실 사이의 미묘한 경계가 있다. 특히 텍스토르가 아내 이사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제롬은 자신이 묻어두었던 감정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왜 자신이 그토록 이 감정을 회피해 왔는지, 왜 그 기억이 자신 안에서 계속 흔들리는지 질문하게 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의 핵심은 두 인물의 정체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진폭에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두 인물의 관계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넘어서, 서로를 통해 드러나는 감정의 이동이다. 텍스토르는 제롬에게 불편함과 두려움, 때로는 알 수 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감정을 끝까지 몰아붙인다.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마음속 파문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이어지며, 관객 역시 제롬과 함께 흔들린다. 이야기의 진행은 한 사람의 내면에 숨어 있던 감정들이 형태를 갖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부정해 온 기억을 마주하는 일이 어떤 울림을 남기는지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를 미워하고 있으며, 그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품은 답을 제시하기보다, 그 질문을 각자의 자리로 가져가게 만든다.

두 사람의 대립이 극에 이르는 순간, 제롬은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시간에 선다. 그 선택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남기는지는 무대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작품은 분명한 질문 하나를 관객 앞에 남긴다. 고통과 기억, 죄책감을 떼어낸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온전한 자신일 수 있을까. 감정의 결단이 때로는 스스로를 지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이 무대는 조용하지만 깊게 환기한다.

이 작품은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무대에서 벌어진 선택은 관객의 자리로 이어지고, 각자 안에 있는 질문을 건드린다. 우리가 감추고 있는 감정의 얼굴은 누구의 것인지, 그리고 그 감정이 사라진다면 과연 자신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지 반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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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극단 신인류
탄탄한 원작과 뛰어난 연기력은 이미 공인받은 바 있다. 연극 '적의 화장법'은 초연 이후 제12회 대전 국제 소극장 연극 축제, 제21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우수상 수상) 등에 초청되며 작품성을 입증했다. 나아가 2025년 제26회 진주 연극 페스티벌과 제35회 거창 국제 연극제 등 전국 주요 축제 초청을 확정하며 이 시대의 수작임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성취는 결국 무대를 책임지는 두 배우의 힘에서 비롯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오직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 위에서 펼쳐진다. 제롬 역의 이승훈은 잔잔한 얼굴 아래 잠식되어가는 감정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관객을 설득한다. 그는 세밀한 내면 묘사와 절제된 표현을 통해 상실한 인간의 현실적 무게를 담아낸다. 텍스토르 역의 서신우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든다. 분명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물이지만, 감정의 결을 따라가는 표현을 통해 관객은 그를 진짜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두 배우는 인물 사이에 팽팽한 긴장을 쌓아 올리며 제21회 월드 2인극 페스티벌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실력을 다시 한번 증명한다.

극본을 맡은 신성우는 심리적 변화의 과정을 촘촘하게 짜며 감정의 이동을 세밀하게 구성한다. 그의 글은 인물의 말과 침묵이 서로 다른 감정선을 만들어내도록 디자인한다. 연출 최무성은 오랜 시간 이어온 연출 작업을 통해 관객을 주체로 세우는 방식을 구체화해왔다. 이번 작품에서도 관객은 제롬과 함께 흔들리며 텍스토르의 목소리를 스스로 들을 수 있도록 이끈다.

무대는 공항과 호텔이라는 익숙한 장소를 사용하지만, 인물의 심리 상태에 따라 그 의미가 계속 변한다. 공항은 사람들의 이동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제롬에게는 얼어붙은 시간의 공간으로 보인다. 그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대화는 관객을 쉽게 안전한 위치에 두지 않는다. 흔한 풍경 속에서도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정체의 감각을 떠올리게 하며, 극은 자연스럽게 관객 스스로의 경험을 소환한다.

극단 신인류는 배우 중심의 창작 방식을 오랜 기간 유지해 온 극단이다. 배우의 몸과 숨이 무대 위에서 직접 서사를 만들어낸다는 철학이 이번 작품에도 반영된다. 거대한 장치보다 인간 그 자체에 집중하는 무대는 관객으로 하여금 인물의 감정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보게 한다. 감정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따라가는 동안, 관객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에도 그 감정의 파동을 계속 떠안게 된다. 작품이 남긴 흔적이 쉽게 희미해지지 않는 이유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속에는 말로 규정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다. 그 얼굴을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하다. '적의 화장법'은 그런 감정을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순간을 무대 위에서 구현한다. 작품 속 제롬의 이야기이지만, 객석에 앉은 이들에게도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 시간은 불편하면서도 자신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으로 남는다.

연극 '적의 화장법'은 오는 12월 10일부터 12월 14일까지 대학로 극장 동국에서 공연된다. 치열한 연기와 심리적 울림이 응축된 작품으로, 현실과 내면 사이의 경계를 라인 없이 넘나드는 감각을 경험하게 한다. 객석을 떠나 극장 문을 나선 이후에도, 마음속 어딘가에서 질문이 또렷하게 떠오를 것이다. 당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그 적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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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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