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제작·행정 활동 등으로 영화계 전반에 발자취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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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영화계에 따르면 김지미는 최근 대상포진을 앓은 뒤 건강이 악화되면서 미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고인의 별세 소식을 이장호 감독이 전해왔다"면서 "유족과 협의해 영화인장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빈소와 장례 일정은 정해지는 대로 공개할 예정이다.
1940년 충남 대덕군에서 태어난 김지미는 덕성여고 재학 시절 미국 유학을 계획한 중에 김기영 감독에게 발탁돼 '황혼열차'(1957)로 데뷔했다. 17세에 배우의 길에 들어선 그는 '별아 내 가슴에'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장희빈' 등으로 196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도시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 관객을 사로잡으며 당대 가장 주목받는 배우로 성장했다.
연기 스펙트럼 역시 넓었다. 김수용·임권택·김기영 등 거장들과 호흡한 그는 '토지'로 파나마국제영화제와 대종상 여우주연상, '육체의 약속'으로 또 한 번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에서는 이산가족을 찾는 중년 여성을 깊이 있게 그려내며 대표작을 남겼다. 필모그래피는 약 700편에 이른다.
스타성과 화제성도 그를 상징하는 요소였다. 가수 나훈아 등과의 결혼과 이혼은 당시 대중문화계의 주목을 받았고, 미국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에 비견될 만큼 화려한 삶을 살았다. 2010년 '영화인 명예의 전당' 헌액 시 붙은 '화려한 여배우'라는 수식은 그의 시대적 존재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제작자로서도 움직임이 활발했다. 1985년 설립한 '지미필름'을 통해 '티켓' 등 7편을 제작하며 영화 산업 전반에 기여했다. 행정가로는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 한국 영화계의 제도 개선에도 힘을 보탰다.
김지미는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배우로서, 인생으로서 종착역에 가까워져 간다. 제게 사랑을 보내주신 관객들의 마음 속에 오래 남고 싶다"고 말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