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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함 속에 쌓아 올린 연기의 밀도, 배우 조영지가 걷는 단단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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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6. 01. 01. 09:15

몰린스 호러영화제 최우수 연기상 수상, 무대와 화면을 건너온 연기의 축적
성과보다 과정으로 증명한 배우, 무대와 스크린을 잇는 연기의 밀도
조영지
영화 '기억의 집' 스틸 사진 / 사진 필름 다빈 SNS 캡처
조영지라는 배우를 설명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은 의외로 '조용함'이다. 목소리는 크지 않고, 제스처도 절제되어 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여리여리한 외형과는 달리 사고는 단단하고 문장은 또렷하다. 감정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보는 쪽을 택하는 사람. 그 차분함은 무대와 화면 위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다만 그 조용함 안에는 오랜 시간 눌러두었던 질문과, 버텨온 시간들이 만들어낸 밀도가 함께 들어 있다.

조영지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배우다. 중앙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직장 생활도 했다. 흔히 말하는 '안정적인 경로'에 올라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본인에게 명확한 꿈을 향한 준비 기간이라기보다는, "막연하고 너무 멀리 있었던 희망"을 애써 현실 속에 눌러두고 있던 시기였다. 그는 당시를 돌아보며 그때는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갈증과 혼돈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겉으로 보기엔 흔들림 없는 선택처럼 보였지만, 내면에서는 계속해서 질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질문은 단순히 진로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가'라는 삶의 방향에 가까웠다. 자기소개서에 적어야 했던 '10년 뒤의 나'를 떠올리며, 지금의 자신으로는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없었다는 고백은 조영지의 선택이 얼마나 오래 숙성된 결과였는지를 보여준다. 안정적인 직장과 생활은 그를 보호해주었지만, 동시에 연기에 대한 갈망을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마음은 점점 혼란스러워졌고, 그 혼란은 결국 결단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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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본인 제공
결정적인 전환점은 어느 한 순간의 극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찾아왔다. 서른을 앞둔 어느 시점, 그는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도달한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앞으로의 삶에서도, 더 먼 훗날에도 같은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그렇게 조영지는 안정 대신 불확실을 택했고, 그 선택은 곧 연극 무대로 이어졌다.

연기를 배운 지 채 1년도 되지 않은 시점, 조영지는 연기학원 워크숍 공연으로 무대에 오른 연극 '의자는 잘못 없다'를 통해 처음 관객 앞에 섰다. 완성된 공연이라기보다 배움의 연장선에 있던 무대였지만, 그는 그 경험을 통해 무대라는 공간이 자신에게 어떤 감각을 불러오는지 또렷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모노드라마 '엄마의 방'을 통해 홀로 무대를 이끌며 관객과 마주했다. 혼자 무대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매 회차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해야 했던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그 시간을 통과하며 그는 연기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구체화해 나갔다. 특히 '엄마의 방'은 조영지에게 무대 위에서 감정을 만들어내는 방식뿐 아니라, 관객과 호흡하는 배우로서의 감각을 깊이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그는 이 시기를 떠올리며 "그때는 정말 많이 울었다"고 말한다. 공연을 준비하며 스스로의 부족함을 자주 마주했고, 하루하루 감정의 진폭도 컸다. 그럼에도 무대에 올라서는 순간, 관객의 숨결을 가까이서 느끼는 시간만큼은 이전의 삶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감각으로 다가왔다. 그 감각은 연기를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삶을 통과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게 만든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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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본인 제공
조영지의 연극 필모그래피는 인물의 스펙트럼이 넓다. '도촌 사람들'의 해원, '남생이'의 노마 어머니, '현혹'의 현인애, '그림자 재판'의 유희, '독심의 술사'의 신이화, 그리고 다시 돌아온 '엄마의 방'의 딸 연우까지. 그는 특정한 유형의 인물에 머무르기보다, 각기 다른 결의 인물들을 차분히 통과해왔다. "닮은 인물과 전혀 다른 인물 중 어느 쪽이 더 끌리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 구분 자체를 유보한다. 닮아 있든 멀리 있든, 결국 모든 인물은 자기 안에서 다시 발견해야 한다는 태도다. 그래서 조영지의 연기는 인물을 덧씌우기보다는, 자신 안의 감정과 기억을 조금씩 열어가며 확장하는 방식에 가깝다.

이 태도는 그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온 이야기 취향에서도 드러난다. 조영지는 인간의 본성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다루는 이야기들에 오래 머문다고 말한다. 그중에서도 소설 '파리대왕'은 반복해서 떠올리게 되는 텍스트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점차 균형을 잃어가는 과정, 질서가 사라진 뒤 드러나는 불안과 흔들림은 그가 인물을 단정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

조영지는 인간을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단순화하기보다, 상황과 조건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로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 그 시선은 그의 연기에서도 일관되게 이어진다. 인물의 행동을 설명하기보다, 그가 놓인 맥락을 끝까지 따라가려는 방식이다.

무대와 매체를 오가는 과정에서 그의 연기는 또 하나의 변곡점을 맞는다. 독립영화와 단편영화 작업을 거치며 조영지는 스스로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말한다. 화면에 담긴 자신의 얼굴과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가 불러오는 기대를 인식하는 과정은 연극과는 다른 종류의 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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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필름 다빈
영화 '기억의 집'에서 조영지는 죽음을 앞둔 엄마를 외면한 채 방문 앞에 멈춰 서 있는 딸 미연을 연기했다. 이 장면은 대사보다 호흡과 눈빛으로 감정을 견뎌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작업을 통해 "연기를 한다기보다 감정을 버텨내는 시간에 가까웠다"고 회상한다. 큰 스크린에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마주하며, 스스로에게도 낯선 표정을 발견한 경험은 배우로서 또 하나의 자각으로 남았다.

이 작품은 해외 영화제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스페인에서 열린 제43회 몰린스 호러영화제에서 '기억의 집'은 VICTOR ISRAEL AWARD를 수상했고, 조영지는 엄마 역의 양말복 배우와 함께 최우수 연기상을 공동 수상했다. 그는 이 경험을 두고 성취보다도 과정이 더 오래 남았다고 말한다. 현장에서 함께 버텼던 시간, 상대 배우와 쌓아 올린 신뢰,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감각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고 있다는 자각이다.

조영지의 연기에는 유난히 생활의 결이 많이 남아 있다. 그는 연기를 감정의 분출이나 극적인 표현에만 두지 않고, 인물이 살아가는 일상의 리듬까지 포함해 바라보는 배우다. 화면 속에서 인물이 음식을 먹고, 걷고, 잠시 멈춰 서는 사소한 순간들까지도 관객의 시선이 머문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그 장면들이 허투루 흘러가지 않도록 스스로를 점검한다. 연기를 감정의 문제로만 한정하지 않고, 삶의 태도와 습관, 몸의 사용까지 확장해 가져가는 방식이다.

그가 좋아하는 영화의 결 역시 이 태도와 맞닿아 있다. 조영지는 장르적 쾌감보다 일상의 결을 차분히 따라가는 영화를 선호한다. 켄 로치 감독의 작품을 언급하며, 사회를 단번에 고발하기보다 한 개인의 삶을 끝까지 밀착해 따라가며 질문을 남기는 방식에 끌린다고 말한다. 인물의 하루와 선택, 말없이 지나가는 순간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서사. 조영지의 연기 또한 그렇게, 과장보다는 축적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에는 독립영화 '오늘의 뒷;풀이'로 서울독립영화제 상영과 GV 자리에 참여했다. 대학로 극단의 최고참 여자 선배 '정은'을 연기한 그는, 공감되는 지점이 많아 즐겁기도 했지만 마음 한켠이 조용히 가라앉는 순간도 있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연극을 올리듯 충분한 연습 기간을 두고 촬영을 준비했는데, 그 과정에서 소통과 유대의 힘, 그리고 현장에서의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영화에 담긴 배우들 간의 케미와 에너지가 관객에게도 전해졌기를 바란다는 말과 함께,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작품에 관심을 갖고 자리를 함께해준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던 시간 역시 감사함으로 남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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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퍼스트레이디'방송장면 / 사진 MBN
얼마 전 막을 내린 드라마 '퍼스트 레이디'에서 지현우의 전 연인 엄순정을 연기한 조영지는, 최근 그의 작업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지점이다. 극 안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하지는 않지만, 다른 인물들의 감정과 서사에 분명한 흔적을 남기는 존재. 그는 이 인물을 '지나간 사람'이 아니라 "그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로 받아들였다. 과거에 머문 인물이 아니라, 극 속 현재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 접근했기에 특별한 연기적 장치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다고 말한다. 시나리오에 준비된 삶의 사건들을 충실히 살아내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었다는 설명이다. 이 작업 이후 그는 부쩍 '사랑'이라는 단어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조영지가 말하는 연기의 목표는 여전히 단순하다. "끊임없이 연기하는 배우." 그는 이 문장을 성취나 야망의 언어라기보다 태도의 언어로 사용한다. 단기적인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멈추지 않고 계속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연기는 혼자서만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며 배웠고, 좋은 인연들이 이어져 지금의 자신이 만들어졌다는 점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의 조영지가 가장 놓치고 싶지 않은 결은 '진정성'이다. 화려함이나 속도보다, 스스로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 그 진정성이 쌓여 언젠가 관객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는 오늘도 연기를 이어간다. 늦게 시작했기에 더 오래 버티고 싶다는 말에는, 그가 지나온 시간과 앞으로 견뎌야 할 시간을 동시에 껴안고 있는 각오가 담겨 있다. 조영지라는 배우는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단한 속도로 자신의 시간을 걷고 있다.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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