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세대의 여성 작가들이 펼치는 개인전이 잇따라 열리며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여성 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 사진의 선구자 박영숙, 촉각을 매개로 감각의 지평을 넓혀온 엄정순, 원색의 자유로운 회화 세계를 구축한 이명미까지 세 작가의 전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여성 예술의 흐름을 조명한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사진작가 박영숙(1941∼2025)의 별세 이후 첫 개인전 '보라, 저 여자가 노래하고 춤춘다'가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박영숙은 한국에서 페미니즘 사진이라는 영역을 개척한 1세대 작가다. 그는 사진 속에서 대상화돼 온 여성을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로 등장시켰다. 이번 전시에서는 그를 대표하는 '미친년들', '육체 그리고 성', '내 안의 마녀' 등 주요 연작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박영숙 작가 아라리오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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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작가. /아라리오갤러리
'미친년들' 연작에는 허공을 응시하는 여성, 한복 치마끈을 풀어헤친 채 웃는 여성 등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여성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작가는 여성의 억눌린 현실을 '미친년'이라는 도발적인 화두로 드러내며 여성의 주체성과 분노를 시각화했다.
포토콜라주 '마녀' 역시 여성 억압의 역사를 환기하는 작품이다. 서양의 마녀 화형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억압받고 희생된 여성들의 기억을 불러내고 위로하려는 메시지를 담았다.
엄정순 개인전 전경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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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 개인전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 전경. /학고재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는 작가 엄정순(65)의 개인전 '보푸라기 - 촉각적 사건'이 열리고 있다. 엄정순은 시각 중심의 미술 감상 방식에서 벗어나 촉각과 청각 등 다양한 감각을 활용하는 작업을 이어온 작가다.
전시의 대표 연작 '무늬 없는 리듬'은 2023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설치작업 '코없는 코끼리'에서 출발했다. 당시 관객들이 작품을 만지며 남긴 체온과 마찰로 양모 표면에 생긴 보푸라기를 떼어내 추상 회화 화면에 붙였다. 작가는 이를 '50만 명의 체온이 남긴 흔적'이라고 설명한다.
점자책으로 구성된 설치작품 '찰나 2001-1' 역시 눈이 아닌 손으로 읽는 경험을 제시한다. 선풍기 바람에 의해 페이지가 넘겨지는 수많은 점자책은 시각 중심의 읽기 방식을 넘어 촉각을 통한 인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작가는 "촉각은 세계와 신체가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감각"이라고 말한다.
엄정순의 코끼리의 어느 모서리 학고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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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정순의 '코끼리의 어느 모서리'. /학고재
우손갤러리 서울과 대구에서는 화가 이명미(76)의 개인전 '얼마나 많은 이명미가 필요한가'가 진행 중이다.
이명미의 회화는 강렬한 원색과 단순한 형태가 특징이다. 사람과 동물을 아이의 그림처럼 천진하게 그리지만 붓질은 섬세하다. 1970년대 단색 추상이 주류였던 국내 화단에서 그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드는 독자적인 화풍으로 활동해왔다.
이명미 개인전 전경 우손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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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미 개인전 전경. /우손갤러리
대표작 '랜드스케이프'는 1990년대 작품을 잘라 새 캔버스에 붙인 뒤 그 위에 다시 그림을 이어 그린 작업이다. 과거와 현재의 그림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방식으로, 작가는 이를 "비빔냉면과 물냉면이 함께 담긴 그림"에 비유했다.
세 작가의 전시는 한국 현대미술 속 여성 작가들이 구축해온 다양한 궤적을 보여준다. 박영숙 전시는 4월 18일까지, 엄정순 전시는 이달 28일까지, 이명미 전시는 5월 9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