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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눈] 약속의 무게…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도 사라진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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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기자

승인 : 2026. 05. 04. 06:43

화면 캡처 2026-05-03 133338
이스라엘의 공습 이후 레바논 남부 마을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다. /로이터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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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국제부 기자
이스라엘이 레바논과의 휴전 합의에도 불구하고 공습을 멈추지 않았다.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서는 연기가 가득하고 이스라엘 텔아비브 전역에서는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이런 현실은 외교에서 '약속'이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잔인하게 증명하고 있다. 서방 외교관들이 '휴전 임박'이라는 낙관적인 성명을 발표하는 순간에도 지상에서는 포성이 멈추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의 협상은 분쟁을 끝내는 열쇠가 아니라, 상대방을 기만하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숨을 고르는 전술적 소모품으로 전락한 듯 보인다.

국제법에는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라는 오래된 원칙이 있다. 이 원칙에 따라 합의된 조약은 당사국들을 법적으로 구속하는 근거가 된다. 이는 국가 간의 신뢰를 지탱하는 최후의 보루이며 국내 정세가 변했다는 이유로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할 수 없음을 규정하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시아파 이슬람주의 성향의 무장 단체 '헤즈볼라'와의 휴전 협상에서 이러한 원칙은 철저히 외면받고 있다.

미국과 이란을 둘러싼 복잡한 담론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핵 합의처럼 정교한 외교적 노력으로 갈등을 조정했지만, 지금은 각국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약속을 쉽게 뒤집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최근 중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국제사회가 지켜온 기본적인 예의와 존중이 처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보여준다. 협상이 진행되는 도중에도 상대의 수뇌부를 타격하거나 약속을 비웃는 듯한 군사 행동을 감행하는 것은 대화라는 형식 자체를 조롱하는 행위다.

겉으로는 '외교적 해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속내를 떠보거나 말을 바꾸는 기만이 일상화되어 있다. 어제의 약속이 오늘은 위협으로 바뀌는 상황 속에서, 국제사회는 스스로 말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예의와 존중이 사라진 외교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고, 그 피해는 무고한 민간인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휴전 조항이나 복잡한 외교 문서가 아니다. 지도자들이 한 나라의 수장으로서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감당하고 책임지는 태도다. 신뢰가 없는 시대에 약속은 결코 평화를 만들 수 없다. '팍타 순트 세르반다'라는 선대의 현인들의 지혜가 박물관의 유물이 아니라 실제로 지켜질 때 비로소 중동의 하늘은 전쟁의 불길 대신 평범한 일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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