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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금융·증권 전문’ 남부지법 보석 76% 화이트칼라…돈 많고 복잡한 범죄 ‘석방문’ 더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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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훈 기자 | 손승현 기자 | 조해수 기자

승인 : 2026. 05. 14. 05:00

1심 구속기간 최대 6개월 전략 삼아
변호인 교체 등 시간끌며 재판 지연
법무부도 제도 개선 필요성에 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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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있으면 죄가 없다."

'유전무죄(有錢無罪)'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사법 불신을 상징하는 단어다. 한때 시대의 냉소처럼 여겨졌던 이 말은 대법원이 펴낸 '사법연감' 속에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냈다. 사법부의 보석 인용 통계 뒤에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화이트칼라들이 보석으로 풀려나는 현실이 겹쳐 있었다.

아시아투데이 법조팀은 서영교 국회 법제사법위원장(더불어민주당·서울 중랑구갑) 측과 함께 2024년 서울중앙지법과 서울 동·남·북·서부지법의 보석 인용(직권 제외) 사건을 전수 분석했다. 그 결과, 보석 인용의 절반 이상이 사기·자본시장법 위반·특정경제범죄법 위반 등 화이트칼라 범죄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석을 범죄 유형별로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보석의 최대 수혜층이 화이트칼라임을 정확한 수치로 보여준 것이다.

◇화이트칼라 범죄 보석, '금융 범죄' 전문 남부지법 76.5% '압도적'
2024년 재경지법의 보석 인용 현황을 분석한 결과, 서울남부지법에서 화이트칼라 범죄 보석 인용 비중이 다른 재경지법에 비해 30%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남부지법은 2024년 보석 신청 192건 가운데 94건(48.9%)을 인용했는데, 이 중 72건(76.5%)이 사기·공갈(21건), 자본시장법 위반(40건), 특정경제범죄법 위반(11건) 사건이었다. 특히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이 40건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금융·증권 사건이 집중되는 서울남부지검 금융·증권범죄 합동수사부 관할 사건이 대거 몰린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다른 법원과 비교하면 격차는 더 선명했다. 서울북부지법은 보석 인용 46건 가운데 화이트칼라 범죄가 19건에 그쳤고, 자본시장법 위반 사건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서울동부지법 역시 보석 인용 41건 중 17건(사기·공갈 9건, 자본시장법 위반 0건, 특정경제범죄법 위반 8건), 서울서부지법은 27건 중 11건(사기·공갈 6건, 자본시장법 위반 0건, 특정경제범죄법 위반 5건)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보석 인용 145건 가운데 69건이 화이트칼라 범죄 사건으로 집계됐지만, 비율 면에서는 서울남부지법에 크게 못 미쳤다.

이들 범죄군의 공통점은 단순히 '경제범죄'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업과 시장, 투자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이용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 특히 자본시장법 위반이나 특정경제범죄법 사건은 단순 개인 범죄를 넘어 투자자 보호, 기업 지배구조 등 시장질서까지 교란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서영교 위원장은 "서울남부지법의 보석 인용률이 48.9%, 인용된 94건 중 자본시장법 위반만 40건에 이른다. 주가조작으로 수많은 개인 투자자의 자산을 약탈한 피고인들이 기소된 후에도 버젓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해외자산 도피, 광범위한 공범 네트워크 등 경제범죄만의 특수성을 외면한 채 일반 형사사건과 동일한 잣대를 적용하는 것은 사실상 증거인멸을 방치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했다.

'라임 사태' 핵심 인물인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의 도주 사건은 화이트칼라 범죄 피고인이 보석 제도를 악용해 사법 불신을 키운 대표 사례로 꼽힌다.김 전 회장은 수원여객 자금과 라임자산운용이 투자한 스타모빌리티 자금 등 1000억원가량 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2020년 5월 구속 기소된 뒤 약 1년여 만에 보석으로 석방돼 불구속 재판을 받았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의 중국 밀항 준비 정황을 포착하고 두 차례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재판에 성실히 출석하고 있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이 와중에 김 전 회장은 전자장치를 훼손한 채 도주했고, 경기 화성시 은신처에서 48일 만에 붙잡혔다.

◇화이트칼라 범죄의 보석 전략 '1심 구속기간 6개월'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1심 구속기간을 기본 2개월로 정하고, 2차례에 한해 2개월씩 연장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1심 단계에서는 최대 6개월만 피고인을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금융·증권 범죄나 대형 배임·횡령 사건처럼 자금 흐름 추적과 공범 관계 규명이 핵심인 화이트칼라 범죄의 경우 이 기간 안에 심리를 마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에 화이트칼라 범죄 피고인들은 호화 변호인단과 함께 이러한 제도적 문제를 파고들어 보석 제도를 악용하고 있다는 게 검찰의 시각이다.

이들의 수법은 치밀하다. 변호인단 교체, 증거 부동의에 따른 대규모 증인 신청 등을 통해 재판부의 심리 일정을 늦추고,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가 재판부의 배제 결정에 즉시항고하며 재판 지연을 유도한 뒤 구속기간 만료 시점에 맞춰 보석을 신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한 대형 로펌 금융·경제범죄 전문 변호사는 "화이트칼라 피고인들은 1심 구속기간 6개월 중 5개월가량 수감된 후 보석으로 풀려나는 것이 '기본 공식'이나 마찬가지"라면서 "기록에 없는 인물들까지 증인으로 신청하는 방식으로 재판 지연을 시도하는 변호인들도 있다"고 귀띔했다.

한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도 "변호인 교체는 재판 지연 효과를 염두에 두고 활용되는 경우도 있다"며 "새로 선임된 변호인 입장에서는 사건 기록과 쟁점을 다시 파악해야 하는 만큼 변론 준비에 시간이 필요해 재판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제한된 구속기간 늘리거나 없애야"
검찰에서도 화이트칼라 범죄 사건의 재판을 두고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일부 사건의 경우 피고인이 실제로 증거를 전부 부동의하며 시간을 버는 '보석 전략'을 펼치고 있지만, 피고인의 인권을 강화하는 현재 흐름으로 제도 개선 논의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검찰 관계자는 "화이트칼라 범죄는 증인신문과 법리 다툼이 장기화하는 경우가 많아 구속 상태에서 필요한 증거조사를 모두 마치고 선고까지 하기 쉽지 않은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현직 법관들 사이에선 화이트칼라 범죄 사건을 둘러싼 '보석 제도' 악용을 막기 위해 6개월로 제한된 구속기간을 늘리거나 없애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한 재경지법의 판사는 "복잡하거나 증거조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사건은 구속기간 내 처리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아 보석 인용이 불가피한 경우도 있다"며 "한때는 구속기간 제한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고 했다.

법무부 역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재판의 복잡도 증가와 공판중심주의 강화에 따른 재판 장기화로 인해 현행 재판 구속기간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경제범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구속기간 제도 전반에 대한 개선 여부(보석 심사 기준 포함)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정민훈 기자
손승현 기자
조해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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