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clip20261027084715 | 0 | | 김명화 작가가 동해시 송정동 솔밭을 드로잉한 수묵화는 길이가 8m가 넘는 그림으로 탄생하게 된다. /부두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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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동해시 송정동의 오래된 솔밭에 가을바람이 스친다.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소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견디며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골목에는 이웃의 정이 살아 숨 쉰다. 이곳에 스케치북과 붓을 들고 나타난 이는 동해에서 활동하는 미농 김명화 작가다.
그가 붓을 든 곳은 송정솔밭 옆 3대의 삶이 이어져 온 '박참봉 댁' 고택이다. 기와지붕의 유려한 곡선과 정원의 나무들, 소나무가 드리운 그림자가 화선지 위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사진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송정의 깊은 시간이 수묵화 속에서 되살아났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다가와 "고맙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달라" 건네는 동네 어르신들의 짧은 말 한마디에는 송정을 향한 넉넉한 애정이 묻어났다.
 | clip20261027144302 | 0 | | 김명화 작가가 수묵화로 그린 박참봉 댁 전경. /김명화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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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국의 흔적과 비행기가 뜨던 전성기의 기록
송정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지난해 9월 아시아투데이 르포를 통해 소개된 바 있듯, 송정솔밭 유적 안내판에는 기원후 2~3세기 철기시대 유적과 약 41만6000㎡에 달하는 면적, 1600가구 이상이 거주했던 실직국 관련 고대 생활문화의 흔적이 담겨 있다. 이 중 1만4125㎡는 2005년 강원도 기념물 제84호로 지정됐다. 출토된 주거지와 토기·철기 유물은 이곳이 오랜 세월 삶의 터전이었음을 증명한다.
오늘날 동해역 인근의 평온한 풍경만으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송정은 한때 동해안의 핵심 생활·교통 중심지였다. 묵호 중앙시장과 견주던 송정시장이 있었고, 명사십리로 불린 송정해수욕장(고 김민기 작곡가가 '친구'를 구상한 장소로 전해짐)과 삼척비행장이 공존했다. 1962년 김포~삼척 노선에 이어 1964년 부산~삼척 노선이 개설됐으나, 비행장은 1974년 항만건설 과정에서 폐지됐다. 철도와 하늘길, 해수욕장과 시장이 어우러져 청춘들의 추억이 쌓이던 송정의 전성기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서서히 잊혀 갔다.
 | clip20261027085429 | 0 | | 송정비행장 모습. 당시 국적기에 코리언 에어 라인이라고 영어 글씨가 쓰여 있다. 송정비행장은 1962년부터 1974년까지 운영됐다. 그리고 항만이 건설되면서 해수욕장과 함께 사라졌다. /동해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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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원 커피와 홍시 한 알, 송정의 진짜 보물
박참봉 댁 며느리 홍 씨의 안내로 둘러본 고택은 사람의 온기로 가득했다. 건축물에 주민들의 삶과 예술가의 시선이 더해지자 평범한 골목은 살아 있는 역사문화 콘텐츠가 됐다.
그 온정은 마을 어귀에서도 이어졌다. 송정설렁탕과 연결된 무인카페는 1500원이라는 뜻밖의 가격에 정갈한 시설과 정원을 품고 있다. 이곳을 마련한 안수동 대표는 "과거 영동권 문화의 중심이었던 송정을 찾는 여행자와 주민들에게 따뜻한 쉼터의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그의 말처럼 직접 뜰에서 키워낸 홍시와 대추를 방문객들에게 아낌없이 건네는 손길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시대에 옛 시골 이웃집 같은 넉넉한 인심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 clip20261027085611 | 0 | | 동해시 송정동 솔밭정원 바로 뒤에 새롭게 조성된 커피 1500원 무인카페. 바로 옆에는 송정설렁탕집이 있다. /부두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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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학 시장의 고민과 AI데이터센터 시대의 비전
송정은 이정학 동해시장에게 남다른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인 이곳에서 이 시장은 시장 출마 전부터 송정솔밭과 옛 마을을 둘러보며 품어온 고민은 명확했다. 문화유산 보호라는 엄격한 제한 속에서도 솔밭을 지키고, 주민들의 일상을 지키며, 나아가 청년들이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발전시키는 것-그것이 바로 보존과 활용을 아우르는 새로운 도시재생의 과제다.
때마침 북평 제2일반산업단지에는 2028년 3분기 가동을 목표로 수전용량 100㎿ 규모의 AI데이터센터 건립이 추진되고 있다. 첨단 인프라가 들어서는 시대에 송정의 역사 역시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다. 철기시대 생활상을 AI 영상으로 복원하고, 옛 해수욕장과 비행장을 디지털 공간에 되살리며, 고대 유물을 모티브로 한 청년들의 공예 창업과 AI 역사문화 콘텐츠관을 연결하는 식이다. 행정과 지역 예술가, 청년 창업자가 손을 잡는다면 송정의 역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미래 산업과 일자리로 확장될 수 있을지 이정학 시장은 고민하고 있었다.
 | clip20261027085249 | 0 | | 1970년 항만 건설 전, 누군가에 의해 그려진 송정리 솔밭과 주변 지도다. 현재 솔밭이 남아 있는 지역은 안담안(솔밭)이 쓰여 있는 부분이다. / 동해문화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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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역에서 다시 울릴 도시의 숨소리
동해역은 단순한 열차 승하차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송정솔밭과 철기시대 유적, 고택과 골목길, 1500원 커피와 따뜻한 인심을 잇는 역사문화관광의 관문이 돼야 한다. 관광객이 늘어나고 철도 이용 수요가 축적된다면 KTX 운행 확대의 근거도 자연스럽게 마련될 것이다.
취재를 마치고 바라본 송정솔밭은 여전히 의젓했다. 김명화 작가의 화선지에 담긴 풍경처럼, 송정은 땅속의 유적이나 건물에 갇힌 과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서 생동하는 보석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일은 명확하다. 잊혀진 시간을 발굴해 미래와 잇고, 송정의 골목골목마다 다시 활기찬 도시의 숨소리가 울려 퍼지게 만드는 일이다. 송정의 보물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비로소 발견하기 시작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