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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에서 공비토벌대로…한국전쟁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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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기자

승인 : 2010. 06. 24. 09:09

[한국전쟁 60년 인터뷰]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의회 회장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의회장.                                                              /이병화 기자photolbh@
[아시아투데이=신대원 기자] 손구원 통일안보중앙협의회 회장은 인민군으로 참전한 뒤 포로수용, 석방, 전투경찰 입대, 공비토벌 등을 거치면서 한국전쟁을 최일선에서 경험한 산증인이다.

손 회장은 지난 1996년부터 대한반공청년단과 대한반공청년회를 계승한 통일안보중앙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15년째 이끌어 오고 있다.

손 회장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이해 “북한은 지금도 언제든지 도발할 수 있다”며 “남한내에서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있어야겠지만 김정일이 착각할 여지를 줘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손 회장은 또 ‘반공포로’에 대한 정부의 최소한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한국전쟁 참전과 포로수용 과정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1953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고3 학생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학업이 중단되는 바람에 평양에서 70리 떨어진 고향에 가있었는데, 그해 12월 강제 모병돼 인민군에 편입됐습니다. 지금 남조선이 대구 부산만 해방시키지 못했는데 공부만 할 수 있느냐며 학생들을 무지하게 끌어갔죠.

인민군 1사단 소속으로 배속됐는데 소속부대로 가던 도중 강원도 양구에서 미군에게 포로가 됐습니다. 그때가 인민군이 한참 후퇴할 때였는데(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한은 대대적인 후퇴작전을 진행중이었다.) 밤에만 움직이고 보급도 안돼 지쳐 있는 상태에서 땅 속 항아리에 있던 쌀을 구해 밥해 먹고 취해 자다 포로가 됐습니다. 사흘을 굶은 다음에 먹은 밥이었는데 밥에 취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죠.

거기서 한 일주일 심문받은 다음 서울, 부산으로 갔다가 미군함정으로 거제도로 후송됐습니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어땠습니까?
=거제도 고현동 골짜기에 17만명의 포로가 바글바글했죠. 중국군이 2만명 정도 있었고 여자가 3000여명 정도 됐습니다.

5000여명 정도로 나뉘어 수용됐는데 취사나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미군은 외부감시만 할 뿐이어서 안에서는 좌익우익 나뉘어 항상 대립상태에 살생과 폭력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이면 한쪽에서는 태극기가 올라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인공기가 올라갔죠.

저는 안에서도 반공활동을 했습니다. 통일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에 남자는 내용으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에게 혈서도 보냈고요...

그 때는 이미 휴전협정 회담이 진행된다는 얘기가 있었기 때문에 휴전 이후에는 다시 남북이 정식으로 왕래하고 통일도 멀지 않겠구나 생각했습니다. 한 1~2년 남아 있으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했는데 60년의 세월이 흐를 지는 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러다가 1953년 6월18일 대한민국이 단독으로 반공애국포로 석방시킨다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원용덕 헌벙사령관을 불러 석방명령을 내리면서 석방됐습니다.

-포로 석방 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석방은 됐는데 무조건 나오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그런데 미군들이 기관단총 들고 미처 도망 못간 사람들을 쫓아가 다시 잡아가기도 하고 사격도 하고 해서 희생자도 있었습니다. 미군들이 부산시내를 수색하고 다닌다 해서 산을 넘어 다니다가 할머니 한분 계신 민가집에서 포로복 대신 헌옷으로 갈아입고 몇일 지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포로들은 머리를 빡빡 깎았기 때문에 금세 구별됐습니다.

그 다음에는 한 파출소를 찾아가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애국청년으로 석방시켜줬다, 책임져달라고 해 숙식제공을 받으면서 몇일 생활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거기 파출소장이 당신들 같은 사람들을 경남경찰국에서 모집한다 해서 지원했습니다. 그 때 저 같은 사람들이 전투경찰의용대로 600여명 선발됐습니다.

이후에는 경남 합천으로 갔는데 2중대장으로 발령돼서 매일 같이 공비토벌에 나섰습니다.
지리산 일대 민간인 출입이 안되던 시절이었는데 공비들이 전후방 없이 출몰하는 바람에 완전무장으로 들어갔죠. 그런데 보급이 제대로 될 리도 없고 막사도 없고 하니깐 산에서 찬이슬 맞고 자고 산머루 같은 열매 따먹고 하는 생활이 이어졌죠.

-전쟁이후에는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전투경찰의용대가 백호부대로 명칭을 바꾸고 부대장으로 있었는데 1955년 7월쯤 공비소탕 작전이 마무리되니깐 부대 전원을 집합시키더니 해체령을 내렸습니다. 후속대책 없는 상황에서 공비소탕 끝나니깐 각자 행동하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군복 입은 채로 무장해제 못하겠다, 지금까지 월급도 못받고 밥도 굶어가며 공비토벌한다고 고생했는데 해체라니 하면서 항의했죠.

그래서 당시 데리고 있던 사람들 가운데 250명 정도가 경찰에 편입됐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남쪽에 집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으니 가호적을 만들려해도 문제가 됐습니다. 결국 자기가 근무하는 경찰서가 주소가 됐죠. 저도 말단 계급으로 경찰에 들어가 18년 동안 근무했고요.

그 다음 세월이 좀 지나 우리가 전쟁 때 고생했던 명예나 입지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국가보훈처를 찾아갔습니다. 보훈처에서는 사실증명을 가지고 오라 하더군요. 그래 국방부를 찾아갔더니 전투의용경찰은 경찰소속이기 때문에 사실증명을 해줄 수 없다하고 경찰에 갔더니 근거가 없다고 합디다. 이렇게 많은 인원이 희생당하고 고생했는데 최소한 기록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했는데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대지휘하면서 가지고 있던 작전기록, 공비사살 사진자료, 휘장, 백호부대 마크, 신분증 등하고 해인사 스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경찰이 사실조사했더니 저만 기록이 나왔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가 추천 보증해 50~60명이 국가유공자 예우를 받게 됐고요.

호의호식하자는 게 아니라 최소한 예우는 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쫓아다녔던 거죠.

-전쟁포로로서 차별은 없었습니까?
=차별은 없었지만 국가에서 후속대책이 전혀 없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이나 정부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3만5000명이나 다른 체제에서 살던 사람을 대한민국에 풀어줬는데 후속대책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최소한 굶지는 않게 하고 자유에 대해, 대한민국에 대해 교육을 시켜줬어야 하는데 그런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항상 시찰대상으로 감시하기만 급급했지 반공애국청년 대접이 이거냐는 생각은 있었죠.
굶지 않기 위해 군대 자원입해한 사람들도 많았는데 신설사단이나 최전방에 반공포로들을 많이 보냈습니다.

또 군번도 안줬습니다. 그 전에 입대한 사람들한테도 휴전협정 이후에야 군번이 나왔는데 사실상 참전유공자인데 휴전되고 나서 주니 거기서 빠지는 거죠. 교활한 방법이었습니다.

진급도 소령 예편이 최고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통일안보중앙협의회의 주요 사업은 무엇인지요?
=6·18 반공의 날, 1·23 세계 자유의 날, 중양절 망향제가 3대 행사입니다. 대부분의 행사를 회원들의 찬조금이나 빚을 내서 하고 있습니다.

특히 반공포로를 석방한 6·18 반공의 날과, 중립국 관리수용소에서 공산측에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유진영을 선택해 귀순한 1·23 자유의 날은 정부와 국제적으로 지정된 기념일인데 정부에서는 나 몰라라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지원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반공 때문에 고향산천도 못가고 귀순했는데 우리의 입지, 명예라도 서글프지 않게 보조해달라는 겁니다. 그런데 정부에서는 이것도 기록이 없다는 이유에서 곤란하다는 말만 합니다.

-한국전쟁 60주년입니다. 현 시점에서 한국전쟁의 교훈을 찾는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김정일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든다 뭐한다 엄포를 놓는데 엄포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북한은 지금도 언제든지 도발할 수 있습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 전까지는 더 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생명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쟁나면 있는 사람들이야 외국으로 가면 그만이겠지만 서민만 죽게됩니다. 젊은세대들이 전쟁을 보지 못해 설마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또 정부에 대한 건전한 비판은 있어야겠지만 김정일이 착각할 여지를 줘서는 안됩니다. 6·25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지금 밀고 내려가면 남로당 조직도 있고 어쩌고 하면서 우리편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대한민국내 갈등이 생기고 김정일에 동조하는 말이 많아지면 전쟁 도발하는 시초점이 될 수 있습니다.
신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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