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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무대란 단순히 연기를 보여주는 공간이 아니다. "무대는 배우로서 저를 끊임없이 발전하게 만들고, 더 나은 연기를 갈구하게 만드는 작업이에요." 그렇게 고형우는 지난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대학로의 공기 속에서 숨 쉬어왔다. 작은 극장, 좁은 대기실, 관객과 불과 몇 미터를 두고 마주하는 현장. 그곳에서 그는 배우로 자라났고, 지금도 여전히 그 무대 위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있다.
고형우는 최근 몇 년 사이 무대를 중심으로 꾸준히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런투패밀리'처럼 관객에게 웃음을 주는 무대에서부터, '파도와 발자국', '두드려라 맥베스', 'Any More Story' 같은 창작·실험극까지 폭넓은 무대를 경험하며 연기의 결을 넓혀왔다. 스크린에서는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과 넷플릭스 시리즈 '택배기사', 드라마 '아씨두리안' 등에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코미디와 가족극, 심리극을 넘나들며 그는 '작은 배역이라도 무대를 흔드는 배우'로 평가받는다. 작품을 선택할 때 그는 흥행보다 도전을 우선시한다. "새롭게 고민할 수 있는 역할에 끌립니다. 잘하는 것만 하면 편하겠지만, 고민할 수 있는 역할이 성장의 원동력이 돼요. 무엇보다 내가 재미있어야 함께하는 동료들도 즐겁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강조하는 건 결국 '즐거움'이다. 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불안과 생계의 무게 속에서도, 그는 "연기하는 시간이 즐겁다"고 말한다. 그 솔직한 한마디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뼈대다.
고형우는 무대와 카메라를 병행한다. "카메라 앞에서는 순간의 집중력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 번의 테이크에 담기는 건 길어야 1분이니까요. 현장에 빠르게 적응하고, 상대 배우와의 리액션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반면 무대는 '지속의 예술'이다. "무대는 동료들과 오랜 시간 고민하며 만들어가는 작업이에요.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도 감정이 무뎌지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순간의 감정이 아니라, 지속되는 진심이 중요하죠."
그는 자신이 '배우 고형우'로 불린다고 실감한 순간을 "가족들이 작품 이야기를 꺼낼 때"라고 했다. "명절에 친척들을 만나면 제가 했던 거의 모든 작품을 이야기하세요. 그럴 때마다 '아, 나는 배우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는 언젠가 시상대 위에서 '배우 고형우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날을 꿈꾸고 있다. 그 순간을 상상하며 오늘도 연습실 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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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대본을 읽었을 땐 단순히 사도세자의 죽음을 다룬 사극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안에는 우리가 몰랐던 사도세자의 감정과 생각이 숨어 있더군요. 그는 '아버지의 사랑에 목마른 미치광이'가 아니라, 세상을 바르게 만들고 싶었던 올곧은 세자였습니다."
그는 사도세자를 '비극의 인물'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한 인간'으로 바라본다. "우리 작품의 해석에서 사도세자는 병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백성을 사랑하고, 어진 왕을 꿈꾼 사람이었어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다고 기록돼 있기도 하고요. 저는 그가 정말로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그의 연기는 사도세자의 내면을 따라 흐른다. 작품 속 여러 장면은 세자의 감정이 점점 무너지고 다시 쌓여가는 과정이며, 각 장마다 다른 결의 감정이 번져 있다. "등장인물마다 감정의 색깔이 다릅니다. 장이 지날수록 세자가 죽음에 가까워지는 신체와 심리의 변화를 표현하려고 했어요."
무대는 '상자'라는 설정을 통해 상상 속 공간을 형상화하지만, 배우에게는 오히려 그 제약이 집중의 원동력이 된다. "무대는 뒤주 속의 상상 공간이에요. 실제로는 공간적 제약이 없지만, 상자 안의 인물이라는 감각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무대 위의 고형우는 여전히 배움의 사람이다. 그는 오디션에서 역할 제안을 받았을 때 두려움이 먼저 들었다고 했다. "사실 처음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역할에 대한 부담이 컸죠. 그런데 첫 리딩날 연출님과 선배님들의 확신을 보면서, '힘들더라도 감수하고 배우자'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영조 역의 김재건, 선희궁 역의 원영애, 홍봉한 역의 김정우 등 노련한 배우들과 함께하면서 그는 "모든 장면이 공부"라고 말했다. "선배님들은 대사 하나, 시선 하나가 다 정확합니다. 같이 연기하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따라가요. 리듬이 맞아떨어질 때의 쾌감이 있습니다." 그는 인터뷰 내내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정말 많이 배우고 있어요. 제 연기의 결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걸 느낍니다."
'사도, 인더박스'가 던지는 질문은 과거의 비극을 넘어 지금을 향한다. "연출님이 말씀하셨어요. 이 작품은 사극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안의 질문은 철저히 동시대적이라고. 오늘날 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지우잖아요. 말로 상처를 주고, 타인을 뒤주에 가두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작은 박스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어요."
그에게 '사도'라는 이름은 단순한 역사적 칭호가 아니다. "생각할 사, 슬플 도. 아버지 영조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하지만, 저에게는 뒤늦은 후회처럼 느껴집니다. 위로의 이름이 아니라, 미안함이 담긴 이름이에요." 배우 고형우는 이 슬픈 이름 속에서 인간의 고독을 본다. 그리고 그 고독을 현재의 감정으로 다시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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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기는 일상과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무대 밖의 삶이 연기를 만들고, 연기가 다시 삶을 바꾼다"고 했다. 대학로는 그에게 여전히 '배우의 쉼터'다. "좋은 공연을 보고 자극받고, 반가운 사람을 만나며 안정감을 얻어요. 대학로는 제게 큰 배우공동체, 하나의 집 같은 곳입니다."
그가 꼽은 가장 깊이 남은 순간은 대학생 시절 맡았던 '원숭이 역할'이었다. "무대 위에서 정말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어요. 지나고 나서 '내가 어떻게 했지?' 싶을 정도로 완전히 몰입했던 순간이었죠. 그게 좋은 연기 아닐까요? 생각이 아닌 본능으로 움직이는 순간 말이에요."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그는 잠시 웃었다. "저의 일상과 성격에 가장 맞닿은 역할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미지와 실제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해요. 제 성격에 딱 맞는 역할을 하면 연기하는 저도, 보는 관객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연기를 즐거워서 시작했듯이, 관객도 어떤 형태로든 즐거움을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팀은 힘든 과정 속에서도 매일 웃으며 연습하고 있어요. 그 마음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전달되길 바랍니다."
오는 10월 23일부터 11월 2일까지, 대학로 지구인아트홀에서 선보이는 연극 '사도, 인더박스'는 젊은 배우 고형우가 사도세자 역으로 무대에 오르는 작품이다. 유진월 작가의 희곡을 바탕으로 박툴 연출이 연출을 맡았으며, 영조 역의 김재건, 선희궁 역의 원영애, 홍봉한 역의 정우, 혜경궁 역의 민정아, 그리고 빙애 역의 민채민 등 세대와 개성을 아우르는 배우들이 함께한다.
그는 무엇보다 연기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해 무대를 채우며, 자신만의 리듬으로 걸어가고 있다.
"언젠가 신인상을 받을 때, '안녕하세요, 배우 고형우입니다'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문장은 아직 미래형이지만, 그의 무대는 이미 그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