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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없는 메시지’의 폭력…미국을 덮친 ‘허무주의적 폭력 극단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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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승인 : 2026. 02. 09. 09:28

미, 사회 붕괴 자체 겨냥한 새 유형의 폭력
WP "민주·공화·이슬람·이념·백인 우월주의로도 설명 안돼"
19세기 허무주의의 온라인 부활·현대 변종
살인마를 '성인'으로 숭배 온라인 하위문화
트럼프 암살 시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2024년 7월 13일(현지시간)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유세 중 저격범에게 피격당해 귀에서 피를 흘리면서 현장을 떠나고 있다./AFP·연합
미국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8일(현지시간), 최근 미국 전역에서 명확한 정치적 의제나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배경 없이 사회의 붕괴와 문명 자체에 대한 무차별적인 파괴를 목적으로 하는 '허무주의적 폭력 극단주의(nihilistic violent extremism)'가 증가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WP는 최근 발생한 일련의 고위직 암살·폭탄 테러·총기 난사·드론 공격 모의 사건의 가해자들이 민주당이나 공화당 지지자·이슬람 극단주의·좌파 안티파(ANTIFA)·백인 우월주의자와 같은 전통적인 범주로 분류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수사관들은 이들이 제시하는 메시지가 "메시지는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라는 허무주의적 태도로 귀결되고 있다고 밝혔다.

◇ 분류를 거부하는 미국의 '허무주의적 폭력 극단주의' 폭력...기존 수사 매뉴얼의 한계

WP에 따르면, 미국 수사당국과 연방 검찰은 최근 발생하는 일련의 공격들이 기존의 수사 매뉴얼이나 정치·이념 범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혼란을 겪고 있다. 가해자들은 특정 정당이나 종교적 신념에 충성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성명서나 선언문에는 인류 전체에 대한 경멸과 문명 붕괴에 대한 욕망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이에 따라 연방 검찰은 2025년 3월부터 '허무주의적 폭력 극단주의'라는 용어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용어가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된 것은 2025년 2월, 내전 조장과 공직자 암살 음모의 일환으로 부모를 살해한 위스콘신주 10대 소년 니키타 카삽의 기소 과정이었다.

연방 검사와 수사관들은 이러한 공격을 19세기에 등장해 도덕적 진리와 우주의 의미에 대한 존재를 부정했던 철학적 입장의 온라인 부활이자, 허무주의의 현대적 변종으로 묘사하기 시작했다고 WP는 전했다.

검찰은 이를 "사회 전반에 대한 증오와 무차별적인 혼란·파괴·사회적 불안을 뿌림으로써 사회 붕괴를 초래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정치·사회·종교적 목표를 달성하려는 범죄 행위"로 규정했다.

뉴욕경찰국(NYPD) 대테러 분석가 출신인 코디 조삭 전략대화연구소(ISD)의 연구원은 "기존의 정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일련의 사례들을 목격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총기 사건
미국 텍사스주 샌안토니오 가톨릭 대주교가 2022년 5월 24일(현지시간) 총기 사건으로 최소 학생 19명과 성인 2명이 숨진 텍사스주 유밸디의 롭 초등학교 앞에서 희생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AP·연합
◇ "인류는 오물"...존재 자체를 향한 선전포고

이 현상을 상징하는 충격적인 사례는 2024년 12월 16일 위스콘신주 매디슨의 어번던트 라이프 크리스천 스쿨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다. 가해자인 15세의 나탈리 럽나우는 현장에서 20발의 총탄을 발사해 교사와 학생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당초 수사관들은 그녀가 온라인에 남긴 인종차별적 비어(slur)나 나치 이미지가 백인 우월주의를 암시한다고 봤으나, 정작 공격 목표가 백인 기독교 학교라는 점에 범행 동기 파악에 애를 먹었다. 결국 그녀의 침실에서 발견된 6쪽 분량의 선언문 '인류에 대한 전쟁(War Against Humanity)'이 범행 동기인 것으로 밝혀졌다.

럽나우는 선언문에서 "인류는 오물(filth)이며 나는 오물을 좋아하지 않고 그 안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며 "이것은 빌어먹을 탈출의 순간이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범죄 행위를 삶으로부터의 탈출로 묘사한 것이다. 그녀는 "인구 전체가 생각하고 자라고 말하는 방식, 가짜 로맨스를 만드는 방식이 싫다. 공공 처형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극단적인 혐오를 드러냈다.

또 다른 사례는 자신을 '반출생주의자(anti-natalist)'로 규정하고 2025년 5월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의 체외수정 클리닉 앞에서 자폭한 가이 에드워드 바커스(25)의 범행이다. 그는 온라인에 게시한 녹음 파일에서 "결국 요점은 '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누구도 나를 이곳에 데려오는 데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 신기술이 연 허무주의의 문...AI와 유튜브가 만든 '외로운 늑대'

WP는 과거와 달리 인터넷·소셜미디어(SNS)·인공지능(AI) 도구가 허무주의적 가해자들의 범죄 실행 장벽을 크게 낮췄다고 평가했다. 과거에는 조직적 구조를 가졌던 테러와 달리, 현재는 개인이 온라인을 통해 기술과 공동체를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네시주 내슈빌 전력망 공격을 모의한 스카일러 필리피(24)는 세계화된 사회의 붕괴를 '끝의 시작'으로 만들고자 유튜브에서 폭발물을 운반할 드론 제작 정보를 찾았다. 바커스는 AI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특정 화학물질의 폭발 속도 관련 정보를 검색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고립된 외톨이들이 파괴적인 기술을 손쉽게 습득하게 만든다고 말했다고 WP는 전했다.

총격사건
2022년 5월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주 버팔로의 한 슈퍼마켓에서 10대 백인의 총격으로 흑인 11명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AP·연합
◇ 살인마를 성인으로 숭배 '트루 크라임' 하위문화의 늪...모방 범죄 확산

WP의 분석에 따르면, 허무주의자들은 온라인 하위문화인 '트루 크라임 커뮤니티(true crime community)'에서 강력한 동기를 얻고 있다. 이곳은 대량 살인마들을 로맨틱한 외톨이나 사회에 복수하는 성인으로 숭배하며 폭력 그 자체를 의미 없는 이상으로 미화하는 공간이다.

실제 럽나우는 선언문에서 과거의 살인마들을 '성인'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2018년 크림반도 대학 테러범에 대해 "그가 얼마나 많은 폭탄 잠재력을 가졌는지 깨달았다"며 테러범을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는 영상에서 "당신들은 뉴스에서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어디에서나 우리를 보게 될 것"이라며 악명을 통한 존재 증명을 꿈꿨다.

이러한 온라인 연결망은 실제 모방 범죄로 이어졌다. 럽나우 사건 이후 테네시·콜로라도·플로리다주 등지에서 유사 사건이 잇따랐다. 테네시주 안티오크의 17세 가해자 솔로몬 헨더슨은 그녀를 '성인'이라 지칭하며 "모두에게 죽음을(Death to all)"이라는 표현으로 사회 전반에 대한 증오를 드러냈다. 미니애폴리스 교회에서 아이들을 살해한 로빈 웨스트먼은 자신의 총기에 '럽나우'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

조이자주 총격 사건
2021년 3월 6일(현지시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일대 3개의 마사지숍과 스파에서 총격 사건이 일어나 한인 여성 4명 등 8명이 숨지고, 1명이 부상을 입었다고 미국 매체들이 보도했다./AP·연합
◇ 파괴를 통한 재건, 가속주의와 허무주의의 위험한 결합

WP는 2024년 7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첫 암살 시도부터 2025년 12월까지의 사건들을 분석한 결과, 확인된 17건의 공격 중 최소 6건이 허무주의적 패턴에 부합했다고 전했다. 나머지는 의료보험 산업·아프가니스탄 전쟁·미국프로풋볼(NFL) 뇌진탕 문제 등 매우 제한적인 개인적 불만에서 출발한 '특수 이해관계형' 공격이었다.

또한 WP는 연방 검찰이 '가속주의'와 허무주의를 연결해 기소한 사례도 있다고 전했다. 17세 니키타 카삽은 대통령 암살과 체제 붕괴를 통해 혼란을 확산시키겠다는 내용의 선언문 '붕괴를 가속하라'를 남겼다. 그는 "대통령을 제거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혼란을 가져올 것이 보장되며, 또한 암살과 붕괴 가속이 가능한 일이라는 아이디어를 대중에게 더욱 심어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이러한 분류가 기존의 인종·혐오 범죄 맥락을 간과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허무주의적 폭력은 '정확한 정의라기보다 진화 중인 틀'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 증오의 유산, 지도층의 언어가 아이들에게 남긴 것

전문가들은 이러한 허무주의적 폭력의 뿌리가 미국 사회 전반에 퍼진 소외감과 공격적인 정치적 수사학에 닿아 있다고 분석한다. 글로벌 증오 및 극단주의 감시단(GPAHE)의 웬디 비아 대표는 WP에 "사람들이 과장된 말(rhetoric·수사)을 듣고 폭력을 해결책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매디슨 경찰청장을 지낸 숀 바네스는 이 어린 가해자들이 느끼는 소외감의 책임이 사회 지도층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사회 최고 지도층이 단합이나 평화적 해결, 타협을 제시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동할 때 우리는 어떤 본보기를 보이는 것인가"라며 "우리 아이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WP는 미국 사회가 겪고 있는 이 새로운 형태의 폭력이 단순한 범죄를 넘어,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분노와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한 거부로 번지고 있다며 '나는 모든 사람을 증오한다'는 감정을 키우는 사회적 담론에 경종을 울렸다.
하만주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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