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리먼 쇼크나 동일본 대지진 때는 위험 회피 심리로 엔 매입이 폭증해 엔고가 발생했으나, 이번 사태엔 그런 기미가 전혀 없다. 마이니치 신문은 16일자에서 미즈호 은행 치프 마켓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을 통해 이 이례적 현상의 배경으로 일본 대외순자산 구조의 근본 변화를 지목했다.
일본 엔은 오랜 세월 '유사시 엔 매입'의 상징이었다. 2008년 리먼 브라더스 파산 사태 때는 글로벌 주식 시장 붕괴 속 위험 자산 탈피 심리가 작용해 엔이 달러당 110엔대까지 치솟았다. 특히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는 일본 기업들의 해외 자산 매각 자금이 대거 엔으로 환류되며 하루 만에 엔당 1엔 상승이라는 초유의 엔고를 기록했다. 이는 일본의 막대한 대외순자산(해외 자산-부채)이 안전통화 지위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日대외순자산, 주식·채권서 현금화 어려운 직접투자로 이동
2024년 말 일본 대외순자산은 533조500억엔 규모로 독일에 34년 만에 세계 1위 자리를 내줬으나 여전히 세계 2위 수준의 거액이다. 그러나 자산 구성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2010년대 중반 이전엔 해외 주식·채권 등 증권 투자가 대외순자산의 50% 이상을 차지해 위기 시 즉시 매각·엔 환류가 수월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기업 인수합병(M&A) 등 직접 투자 비중이 폭발적으로 늘어 2024년 기준 약 60%에 육박하고, 증권 투자는 30% 미만으로 쪼그라들었다.
|
◇엔저 장기화와 한일경제 파장
이번 사태는 그 변화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2026년 2월 말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습으로 유가가 폭등하고 지정학적 리스크가 최고조에 달했으나, 엔화는 달러 강세에 밀려 약세를 지속했다. 투자자들은 금·미 달러·스위스 프랑 등 전통 안전자산으로 도피하며 엔을 외면했다. 마이니치 신문은 "전쟁 위기에도 엔고 대신 엔저가 표준이 된 외로운 현실"이라고 꼬집었다.
배경엔 일본은행의 초초저금리 정책과 트럼프 행정부 재선 후 달러 강세가 겹쳤다. 엔 캐리 트레이드(엔 매도·고금리 통화 매수)가 부활하며 엔 매도 압력이 커졌다. 과거엔 대외순자산의 증권 투자 부분이 위기 시 자동으로 엔 강세를 유발했으나, 이제 직접 투자 중심 구조가 이를 차단한다. 전문가들은 "대외순자산 규모가 회복돼도 구성 변화 없인 안전통화 지위 복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
이 변화는 일본 경제에 중대한 도전이다. 엔저는 수입 물가 급등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을 키우고, 기업 수익을 갉아먹는다. 일본 정부는 해외 투자 다각화와 환율 안정 대책을 검토 중이나 효과는 미지수다.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엔의 위상이 근본적으로 바뀐 지금, 전쟁 같은 유사시에도 엔고를 기대할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이 명확해진 것이다. 한국 경제도 엔저로 일본산 수입품 가격 상승과 무역 여건 악화 우려가 커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