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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도 기적도 없는...삶의 끝에서 묻는 인간의 존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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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객원 기자

승인 : 2026. 07. 2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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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닥터루멘'
김현호레퍼토리 창단 5주년 기념작
29일부터 8월2일까지 대학로 '열린극장' 무대에
닥터루멘 (1)
연극 '닥터루멘' 연습 장면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제공
삶을 연장하는 것이 의료의 역할이라면 인간을 끝까지 인간답게 지키는 것은 무엇일까.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 의학은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고 생명을 연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마지막 순간은 찾아온다. 더 이상 치료가 답이 되지 않는 시간, 사람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며 누군가의 삶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김현호레퍼토리 창단 5주년 기념작 연극 '닥터루멘'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병실이라는 가장 익숙하면서도 가장 낯선 공간을 무대로 삶과 죽음, 돌봄,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한다.

닥터루멘 (2)
연극 '닥터루멘' 연습 장면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제공
작품의 무대는 대학병원 내과 병동이다. 폐암 말기 환자, 알코올성 간경화 환자, 긴 치료를 견뎌야 하는 아이와 보호자 등 각각 다른 병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병실에 모여 있다. 어느 날 한 환자에게 시한부 선고가 내려진다.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 남겨질 시간을 견뎌야 하는 사람,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과 마주해야 하는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걸어간다.

병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삶과 죽음, 희망과 체념, 이별과 기다림이 공존하는 공간이며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비로소 같은 시간을 공유하게 되는 장소다. 이 안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침묵과 위로를 통해 인간이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작품은 묻는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김현호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인간 존엄과 돌봄'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며 "비급여 치료와 지원의 사각지대에서 고통받는 환자들과 그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현실, 그리고 현대 사회에서 희미해져 가는 이웃 간의 '정'과 가족의 의미를 병실이라는 공간을 통해 짚어보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창한 구원이나 기적이 아닌, 서로의 삶을 묵묵히 보듬고 함께 버텨주는 '동행의 가치'를 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닥터루멘 (4)
연극 '닥터루멘' 연습 장면 / 사진 김현호레퍼토리 제공
김현호레퍼토리는 공동체를 조명한 '눈먼자들', 학교폭력과 정의를 다룬 '재판' 등을 통해 사회의 균열을 무대 위로 옮겨왔다. 이번에는 삶의 끝자락에서 비로소 드러나는 사람의 온기를 바라본다.

김현호는 "의료진은 완벽한 신이나 절대적인 구원자가 아니라 고통 앞에서 고민하고 때로는 무력함을 느끼면서도 매일 병실로 출근해 환자의 곁을 지키는 또 한 명의 인간일 뿐"이라며 "소아백혈병 환아, 중증 암 환자, 보호자, 그리고 의료진까지 모두가 각자의 고독과 싸우고 있지만 적어도 이 병실 안에서만큼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함께 버텨내는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모든 것을 해결하는 영웅이나 기적처럼 생명을 구하는 주인공이 없는 이유다.

대신 삶의 가장 힘겨운 시간을 함께 견디는 사람들이 있다. 의사와 간호사는 환자의 시간을 대신 살아줄 수 없지만 그 시간을 함께 걸어갈 수는 있다. 연출의 글에서 김현호가 남긴 '환자의 시간을 함께 걷는 사람이요'라는 말은 작품이 바라보는 의료의 본질을 함축한다. 작품 제목 '루멘(Lumen)'은 빛의 밝기를 나타내는 단위다. 김현호는 "'닥터루멘'이 말하는 빛은 어둠을 쫓아내는 거대한 불빛이 아니라 어두운 터널 속에서 서로의 곁을 지키며 함께 걸어가는 '동행의 빛'"이라고 설명했다.

연극 '닥터루멘'은 오는 29일부터 8월 2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열린극장에서 공연된다.
전형찬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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