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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호 별세] 스스로 ‘라면쟁이’ 칭한 신춘호 회장, 어떤 인물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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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연 기자

승인 : 2021. 03. 27. 09:45

1930년 울산에서 태어나 1963년부터 독자 사업 모색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 두고 국민라면 신라면 개발
신춘호 회장
신춘호 농심 회장
신춘호 농심 회장은 제품 개발과 브랜드와 관련해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부르는 별명은 ‘라면쟁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라면왕’이라고 부른다.

그는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중 셋째 아들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3남 2녀를 뒀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故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하여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둔 것도 이런 장인정신을 대변한다. 당시 라면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겠지만, 신 회장은 이런 방식으로는 농심 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나아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 회장의 고집이 드러나는 때는 안성공장 설립 시기다. 당시 그는 국물 맛에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또한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 회장의 감각이 반영돼 있다. ‘신라면’ 역시 그가 지은 이름이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으로 돼 있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춘호회장이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라면으로 등극했고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 유통채널에서는 물론이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농심 신춘호 회장
신춘호 회장
안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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