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 두고 국민라면 신라면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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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0년 12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태어났다. 부친 신진수 공과 모친 김필순 여사의 5남 5녀중 셋째 아들이다. 1954년 김낙양 여사와 결혼해, 신현주(농심기획 부회장), 신동원(㈜농심 부회장), 신동윤(율촌화학 부회장), 신동익(메가마트 부회장), 신윤경(아모레퍼시픽 서경배회장 부인) 3남 2녀를 뒀다.
1958년 대학교 졸업 후 일본에서 성공한 故신격호 회장을 도와 제과사업을 시작했으나, 1963년부터 독자적인 사업을 모색했다. 신 회장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전되던 일본에서 쉽고 빠르게 조리할 수 있는 라면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신 회장은 “한국에서의 라면은 간편식인 일본과는 다른 주식”이어야 하며 따라서 “값이 싸면서 우리 입맛에 맞고 영양도 충분한 대용식이어야 먹는 문제 해결에 큰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 회장의 브랜드 철학은 확고하다. 반드시 우리 손으로 직접 개발하여야 하며, 제품의 이름은 특성이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명쾌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국적인 맛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사 설립부터 연구개발 부서를 따로 둔 것도 이런 장인정신을 대변한다. 당시 라면산업이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일본의 기술을 도입하면 제품 개발이 수월했겠지만, 신 회장은 이런 방식으로는 농심 만의 특징을 담아낼 수도, 나아가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신 회장의 고집이 드러나는 때는 안성공장 설립 시기다. 당시 그는 국물 맛에 변화를 이루기 위해 선진국의 관련 제조설비를 검토하되, 한국적인 맛을 구현할 수 있도록 턴키방식의 일괄 도입을 반대했다. 선진 설비지만 서양인에게 적합하도록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농심이 축적해 온 노하우가 잘 구현될 수 있는 최적의 조합을 주문한 것이다.
또한 유기그릇으로 유명한 지역명에 제사상에 오르는 ‘탕’을 합성한 ‘안성탕면’이나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조합한 ‘짜파게티’, 어린 딸의 발음에서 영감을 얻은 ‘새우깡’ 등 농심의 역대 히트작품에는 신 회장의 감각이 반영돼 있다. ‘신라면’ 역시 그가 지은 이름이다.
당시 브랜드는 대부분 회사명이 중심으로 돼 있었고,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춘호회장이 발음이 편하고 소비자가 쉽게 주목할 수 있으면서 제품 속성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는 네이밍이 중요하다며 임원들을 설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라면은 1991년부터 국내시장을 석권하는 국민라면으로 등극했고 세계시장을 공략하는 첨병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실제로 신라면은 미국시장에서 일본라면보다 대부분 3~4배 비싸다. 월마트 등 미국 주요 유통채널에서는 물론이고, 주요 정부시설에 라면최초로 입점돼 판매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한국 특유의 얼큰한 맛으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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