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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12. 11:32

‘서울의 별’ 미령 역으로 무대에 서는 배우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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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5일 개막하는 연극 '서울의 별'에서 미령 역을 맡은 하지영 / 사진 본인 제공
그날의 오디션장은 늘 그렇듯 분주했다. 연극 '싸이킥'의 배우를 찾기 위해 마련된 자리, 지원자들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하나씩 들어와 오디션을 치르고 있었다. 서류와 프로필 사진을 번갈아 보던 순간, 하지영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그는 이미 무대 위 사람처럼 공간의 공기를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대사 첫 마디를 꺼낼 때의 단단한 발성과, 인물의 감정을 단숨에 잡아채는 눈빛이 또렷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표정과 호흡이 변주되는 과정을 보며, '이 배우는 오래 기억에 남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당시에는 단지 오디션장에서의 한 장면이었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된 지금, 그 순간이 그녀의 오늘을 예고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2003년 KBS 18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한 하지영은 처음부터 '무대 체질'이었다. 웃음을 만드는 순간보다 사람의 마음을 풀어내는 대화 속에서 더 큰 반응을 얻었고, 이 감각은 곧 방송 리포터와 MC로 이어졌다. SBS '한밤의 TV연예'는 그의 방송 인생을 대표하는 무대가 됐다.

하지영은 10년 넘게 1000명 이상을 인터뷰하며 카메라 앞에 섰다. 현장에서 스타들의 표정을 읽고, 그날의 분위기를 빠르게 파악해 편안한 대화로 이끄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민감한 이슈가 터졌을 때도 억지로 말하게 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입을 열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율했다. "결혼이나 열애, 사건사고처럼 민감한 사안을 다룰 때도 어떻게 하면 상대가 어렵지 않게 이야기할 수 있을지를 먼저 생각했어요. PD님과 상의해 인터뷰가 '잘 나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고, 끝나고 고맙다고 해주신 분들도 있었죠."

이 경험은 그를 '행사 전문 MC'로 확실히 자리매김하게 했다. 박경림을 잇는 2세대 전문 MC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영화 제작보고회, 드라마 제작발표회, VIP 시사회, 쇼케이스, 팬미팅까지 현장 경험만 수백 건이다. 그는 무명 배우나 신인 출연자의 경우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어떤 배우에게는 이번 무대가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잖아요. 기사 한 줄이라도 더 나가게 하려고 신인이나 무명 배우는 자료를 더 찾아보고, 소개를 조금이라도 더 빛나게 만들려고 해요."

그의 행사 진행에는 남다른 인연도 많다. 특히 배우 이종석과는 2014년 무렵부터 시작해 군 복무 시기를 제외하고 매년 함께했다. "이종석 씨가 저를 팬미팅 MC로 키워줬어요. 처음부터 늘 기회를 줬고, 그 덕분에 팬들과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를 배웠죠." 유연석, 박보검, 이준혁, 김혜윤, 장기용, 안보현, 손나은 등 수많은 배우들의 팬미팅과 행사 현장에서 그의 안정감 있는 진행과 세심한 배려는 빛을 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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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적 독자 시점' 레드카펫 행사에서 배우 박보검과 함께한 하지영. / 사진 하지영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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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유연석의 팬미팅을 진행한 하지영. / 사진 하지영 인스타그램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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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김혜윤의 팬미팅을 진행한 하지영. / 사진 하지영 인스타그램 갈무리
그러나 '한밤'이 막을 내린 뒤, 그는 화려한 방송 무대에서 잠시 물러나 대학로로 향했다. 하지영은 이를 '전향'이라 표현하지 않는다. "고등학교도 연극부였고 대학교도 연극영화과를 다녔어요. 한밤이 끝난 후 원래 연기에 대한 질문이 있었던 터라 그 본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겠다 싶었죠. 내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지 제대로 마주하고 싶었고, 그 가능성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고 그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연극 무대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낯설다고 느껴지지 않았어요. 관객의 라이브함이 낯설지 않았고, 원래 하던 라이브함의 연장선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야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편안함 속에도 처음 무대에 서는 설렘과 긴장, 그리고 부담이 있었다. 그는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은 아주 감사한 일"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과정에서 주어진 고난과 고통, 시련과 상처까지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건 피할 수 없는 과정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첫 무대에서 미역국을 엎어버리는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넘어갔다.

무대에 서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생계였다. "연극에 집중하기 위해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행사를 진행하는 것에 집요하게 공부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 한밤이 끝난 후 원래 하던 방식 말고 다른 면모로 더욱 잘해야 행사도 진행할 수 있었던 시기였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맡은 인물에 근접했다고 느낄 때의 짜릿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상이었다.

그는 '레미제라블'의 코제트와 에포닌, '싸이킥', '말리나', '가족입니다', '섬마을 우리들', '임대아파트', '행복리', '진짜나쁜소녀' 등 다양한 작품에서 비극과 정극을 주로 연기했다. 방송에서 보여주던 밝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배역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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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싸이킥' 연습 장면. / 사진 극단 화동연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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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가족입니다'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웃어
하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선택을 했다. 연극 '서울의 별'에서 여주인공 조미령을 맡은 것이다. "조미령은 참 많은 상처가 있고 외롭고 힘든 인물이지만, 본연의 진취적이고 긍정적이고 밝은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아직 인생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문호와 덤덤히 자신의 생을 지켜나가는 만수와 다르게, 무엇을 위해 가야 하는지 알고 있는 인물이고,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사람, 또 등장인물 중 가장 밝은 엔딩의 주역 같았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는 평소보다 하지영의 요소를 끌어와 관객이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지금까지는 비극과 정극 등 방송하던 하지영이 연상되는 캐릭터를 맡은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번에는 일상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가며 좀 더 친근하고 가볍고 재미있게 보시기 위해 그런 부분을 신경 썼어요."

조미령과 자신을 잇는 연결고리는 한 대사였다. "어두운 곳에선 밝은 곳이 더 밝게 보이는 법이래요. 부러워 말아요. 우리도 눈부시게 살 날이 오겠죠." 그는 "그 대사를 할 때는 나의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고 생각했어요. 긍정적인 미령이가 하지영과 닮았다고 느낀 순간이었죠"라고 말했다.

연극과 드라마·영화의 차이에 대해서는 "연기 차이를 말하기엔 좀 더 해보고 말씀드릴게요"라며 웃었다. 하지만 무대에서 1시간 반 동안 인물에 몰입하는 경험이 자신을 바꿔놓았다는 건 분명하다. "생각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러니 행동의 변화, 마음의 변화, 소리의 변화 등을 가져왔어요. 방송에서 요구하던 모습보다 좀 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고, 덕분에 성장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만들어주고 있는 듯합니다."

연기에 대해 그는 "아주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캐릭터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건 이해와 헤아림이다. "그 인물을 계속 헤아리고 또 헤아려야 해요. 그래야 더 깊이 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경험 역시 필수적이다. "삶의 경험이 아주 중요해요. 그 경험과 감각으로 더 확장시키고 더 표현하고 더 많은 사고를 할 수 있으니까요. 생각이 넓어지면 그만큼 연기도 넓어진다고 생각하고, 그 바탕에 경험이 더 다양하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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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싸이킥' 공연 장면. / 사진 극단 화동연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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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미제라블'에서 코제트 역을 맡은 하지영의 공연 장면 / 사진 하지영 인스타그램 갈무리
공연 현장을 지켜보면, 무대 위의 배우만큼이나 무대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도 시선이 간다. 조명과 음향, 무대 전환, 의상과 분장,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연을 완성하는 수많은 손길들. 하지영은 이들을 그저 '스태프'로만 대하지 않는다. 무대 뒤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고 작은 배려를 잊지 않는다. 오래 현장을 함께해온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그 진심은 현장 분위기를 밝히고 연습 과정 전반을 부드럽게 이끈다. 대기실과 무대 뒤를 오가며 스태프, 동료 배우, 기술팀까지 두루 챙기는 모습은 연습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작은 농담 하나, 먼저 건네는 미소 하나가 공간의 공기를 바꾼다.

그 에너지는 우연이 아니다. 필라테스 자격증을 취득하고, 복싱과 배드민턴으로 몸을 단련하며 체중을 유지하는 철저한 자기관리는 그의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다. "운동을 죽도록 싫어했는데, 안 먹고 운동해서 버티는 거죠."라며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뒤에는 매일의 꾸준함이 있다. 방송, 무대, 행사, 유튜브를 넘나드는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스스로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끌어올리고 유지하는 습관이, 특유의 에너지와 집중력을 가능하게 한다.

또한 팬클럽 '하바라기'와의 관계에서도 그 세심함이 드러난다. 단순히 팬과 스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근황을 기억하고 공연이나 행사 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한다. '하바라기'는 단순한 응원을 넘어 함께 성장하고 추억을 쌓는 작은 공동체가 됐다.

앞으로 하지영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묻자 그는 웃으며 "지금은 '서울의 별'의 조미령 아닐까요"라고 답했다. 장르나 캐릭터의 경계는 두지 않는다. "어떠한 장르, 어떠한 연기든 마다할 이유와 시간이 없어서 많은 경험을 쌓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관객의 마음을 일렁일 수 있는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라고 했다.

최근 그는 개인 유튜브 채널을 열어 새로운 무대에 도전하고 있다. 일상과 대화를 결합한 콘셉트로, 가벼운 야외 활동이나 소소한 체험을 통해 게스트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을 구상했고, 첫 게스트로 배우 류승룡이 출연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며 채널의 문을 열었다. 방송 현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편안한 장면들이 담기고, 오랜 방송과 무대 경험에서 비롯된 순발력과 유연한 소통 감각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어떻게 확장될지 관심이 쏠린다.

무대 활동도 이어간다. 오는 8월 15일부터 10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하우스에서 공연되는 연극 '서울의 별'에 출연해, 평범한 이웃의 얼굴 속에 숨은 이야기를 관객과 나눌 예정이다. 방송과 행사, 그리고 연극 무대를 오가며 그는 여전히 '사람'을 중심에 두고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영의 커리어는 직선이 아니라 유연한 곡선처럼 이어져 왔다. 그 곡선 위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는 관객을, 행사장에서는 출연자를, 카메라 앞에서는 시청자를 마주해왔다. 다양한 무대와 현장을 오가면서도, 연기를 대할 때면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진짜 연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매 작품, 매 무대, 매 현장에서 그 답을 온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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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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