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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8. 13. 18:42

[인터뷰] 연극 '상대적 속세' 연출 나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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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상대적 속세'의 연습을 지켜보고 있는 나옥희 연출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배우 고수희. 이 이름은 우리에게 단순한 연기자를 넘어, 무대와 스크린을 오가며 매 작품마다 독보적인 존재감을 각인시킨 관록의 배우로 기억된다. 그는 1999년 연극 '청춘예찬'으로 데뷔한 이래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 영화 '친절한 금자씨', '써니', 드라마 '마녀의 사랑' 등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연기력과 흥행성을 모두 인정받았다. 특히 그는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로 동아연극상을, '야끼니꾸 드래곤'으로는 외국 배우 최초로 요미우리여자연기상을 수상하며 배우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그런 그가 연극 '상대적 속세'의 막을 올리기 전 '연출가 나옥희'라는 이름으로 인터뷰 자리에 앉았다. 배우로서의 활동과 더불어 연출의 길을 꾸준히 걸어온 그의 눈빛은 깊은 확신과 함께 새로운 작품을 향한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리허설이 한창인 현장은 배우를 향한 그의 섬세한 손길과 따뜻한 시선으로 가득했고, 그에게서 배우 고수희가 아닌 연출가 나옥희로서의 확고한 예술적 철학이 느껴졌다.

나옥희 연출은 배우에서 연출가로의 전환이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회상한다. "오랫동안 배우로 살아왔지만, 늘 무대 전체에 대한 고민이 있었어요. 연극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잖아요. 희곡이 가진 메시지를 어떻게 하면 관객에게 더 깊이, 그리고 온전히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저를 이 길로 이끌었죠."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1년 한일공동제작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에 출연하면서였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배우들이 하나의 무대 위에서 오직 연기라는 언어로 진심을 나누고 소통하는 과정은 그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고, 연극이 가진 경계 없는 소통의 힘을 깨닫게 했다.

그는 그 경험을 통해 일본 현대 희곡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단순히 대본을 해석하고 연기하는 것을 넘어 작품의 전체적인 메시지를 관객에게 온전히 전달하는 연출의 역할에 매료되었다. 그렇게 창단된 극단 '58번국도'는 그가 꿈꾸던 새로운 예술적 도전의 시작이었다.

"극단 이름인 '58번 국도'는 일본 오키나와를 관통하는 가장 긴 국도예요.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문화적 경계를 잇는 길처럼, 저희 극단이 과거와 현재, 산 자와 죽은 자,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타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통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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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상대적 속세' 무대 미니어처. 공연의 공간 구성을 압축적으로 담아낸다.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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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상대적 속세'의 연습 중 특정 장면에 대해 설명하는 나옥희 연출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그의 연출 여정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철학은 바로 '배우 우선주의'이다. 그는 화려한 무대 장치나 현란한 미장센보다는 배우의 진솔한 연기와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는 연출을 지향한다.

"저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낼 수 있는 '안전한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배우가 편안함을 느껴야 비로소 캐릭터의 진심이 나오거든요. 그게 곧 관객에게 전달되는 진정성이고요. 저 역시 배우였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아요." 그가 배우 시절 수없이 느꼈던 무대 위에서의 고민과 두려움은 이제 배우들의 감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존중하는 연출력으로 이어졌다.

리허설 내내 그는 배우들을 향해 "그 감정이 진짜 맞는지"를 끊임없이 질문하며, 각자의 내면에서 인물의 서사를 끌어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깊이 있는 소통을 통해 배우들은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것을 넘어, 캐릭터의 삶을 온전히 체화하고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게 만든다. 오랜 시간 무대를 경험한 배우 고수희가 연출가 나옥희가 되어 건네는 이 섬세한 가이드가 바로 '상대적 속세'의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다.

그의 연출 철학은 전작들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연출가로서 첫 발걸음을 내디딘 '접수'는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리는 한 남자가 신경정신과 '요시다 클리닉'에서 진료 접수를 하며 벌어지는 단막의 부조리극이다. 접수대 앞에서 오가는 질문과 답, 번번이 빗나가는 절차 속에 현대 사회의 불안과 소통의 단절이 드러난다. 그는 "무거운 주제를 블랙코미디의 리듬으로 옮기되, 배우의 호흡이 먼저 살아야 장면이 선다"고 회상한다.

이어 연출한 '이방인의 뜰'은 사형수가 스스로 집행일을 정할 수 있게 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구치소 면회실에서 마주한 여자 사형수와 취재를 위해 찾아온 남자의 대화로 전개된다. 여자가 '옥중결혼'을 제안하면서 드러나는 선택의 역설과 관계의 권력을 통해 사형제와 인간의 존엄을 질문하는 작품이다. 그는 "좁은 면회실에서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진 두 사람이 서서히 서로의 내면에 다가가는 과정이, 우리 극단이 오래도록 품어온 질문과 맞닿아 있었습니다"라고 전했다.

'비와 고양이와 몇 개의 거짓말'은 환갑을 맞은 한 남자가 비 오는 날 불현듯 찾아온 과거의 인연들과 마주하며,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는 이야기다. "한 인간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는 순간, 그 안에는 웃음과 쓸쓸함이 동시에 자리한다"는 시선이 무대에 녹아들어, 관객이 인물의 선택을 끝까지 따뜻한 여운 속에서 지켜보게 한다.

그리고 다케다 모모코의 희곡을 원작으로 한 연극 '타인'을 통해 현대인의 외로움을 섬세하게 풀어냈다. 이 작품은 연인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해 그 어머니와 전 여자친구가 주인공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나옥희 연출은 "예기치 못한 만남을 통해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결국 치유에 이르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이 경험이 바로 '상대적 속세'를 만나게 된 중요한 발판이 되었죠"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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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타인'의 공연 사진 / 사진 극단 58번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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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상대적 속세'의 컨셉트 사진 / 사진 극단 58번국도
이번 작품 '상대적 속세'는 일본 현대 희곡을 대표하는 작가 츠치다 히데오의 명작을 원작으로 한다. "츠치다 히데오 작가는 일상적인 삶의 부조리를 따뜻하고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데 탁월해요. 인간의 고독과 슬픔을 유쾌한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능력이 정말 대단하죠. '상대적 속세' 역시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가벼운 유머와 밝은 분위기를 잃지 않아요." 나옥희 연출은 원작의 이 매력에 크게 이끌렸다고 한다.

극의 이야기는 20년 전 불의의 화재 사고로 친구를 잃은 고등학교 동창들이 죽은 줄 알았던 친구들과 기묘하게 재회하며 시작된다. 무대 위에서 산 자와 죽은 자,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기이한 서사 속에서 인물들은 잊고 지냈던 상처와 후회, 오해의 감정을 마주하게 된다.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면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는 희망을 얻었으면 해요. 그리고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대적 속세'라는 제목처럼,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자들의 고통과 죽은 자들의 위로를 교차시키며, 우리가 믿는 진실과 현실이 얼마나 상대적인지 질문을 던진다.

이번 공연에는 성노진, 고영빈, 고병택, 장원영, 이종원 등 모든 배우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강렬한 앙상블을 선보인다. 나옥희 연출은 "배우들의 진심이 담긴 연기가 없다면 이 작품은 공허한 외침에 불과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배우들과의 깊은 소통을 통해 인물들이 겪는 내면의 갈등과 감정의 변화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이들의 완벽한 호흡이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과 함께 따뜻한 웃음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나옥희 연출은 인터뷰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바람을 전한다. "연극이 끝난 후, 관객들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며 따뜻한 위로를 얻어갔으면 좋겠어요. 저는 연극이 단순히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관객들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힘이 있다고 믿거든요."

배우로서 이미 동아연극상, 요미우리여자연기상(외국 배우 최초)을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한 그이기에, 이제 연출가로서의 능력 또한 충분히 인정받아 연극계에 새로운 수상 소식을 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연출가 나옥희가 선보이는 또 하나의 진심 어린 무대인 연극 '상대적 속세'는 오는 8월 15일부터 17일까지 의정부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예정이다.

포스터
전형찬 선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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