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하늘 | 0 | 푸른 하늘과 맞닿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 '하늘마당'. / 사진 전형찬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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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을 부르는 일은, 선언에서 시작된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내놓은 국제 협력 특별전 '봄의 선언'은 제목 그대로, 예술이 시대의 냉기를 헤치고 앞으로의 시간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지 묻는 전시다.
내년 2월까지 ACC 복합전시1관과 미디어큐브 일원에서 이어지는 이번 프로젝트는 홍콩 M+와 독일 ZKM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가 손을 맞잡은 초대형 공동 제작으로, 기후위기와 생태 전환, 민주적 공존이라는 난제를 예술적 실험으로 가시화한다. 광주라는 장소성과 ACC 10년의 궤적을 겹쳐 보며, "예술은 어떻게 새로운 봄을 선언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차분히, 그러나 단호하게 끌고 간다.
 | 01 | 0 | 석유 산업의 흔적을 드러낸 테리토리얼 에이전시 '석유 박물관'. / 사진 ZKM Karlsruhe, 하랄트 펠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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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두 개의 큰 흐름으로 관람자를 이끈다. 첫 번째 섹션 '우리는 어디까지 왔는가'는 인류세 이후의 세계가 직면한 균열―기후 재난과 불평등,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을 응시한다. '인류 전체'의 잘못으로 책임을 균질화하는 관습적 서사를 벗겨내고, 제이슨 W. 무어와 도나 해러웨이가 제기한 '자본세' 담론을 호출해 권력과 자원의 비대칭, 추출의 역사, 복원과 정의의 언어를 재배열한다. 이를테면 테리토리얼 에이전시의 대형 설치 '석유 박물관'은 "석유를 땅속에 남겨두자"는 급진적 명제를 통해 에너지 체제 전환의 상상력을 전시장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석유가 구축한 영토의 데이터와 원격탐사 이미지가 켜켜이 겹쳐지는 장면은, 산업의 끝이 아니라 제도의 전환을 설계하는 출발점이 어디여야 하는지 되묻게 한다.
 | 02 | 0 | 산호초를 정치 공동체로 상상한 보 정의 '산호초에서의 정치 생활 1'. / 사진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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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섹션 '봄의 징표들'은 인간 너머의 존재들과 맺는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이끼바위쿠르르가 제안한 마당형 공간은 관객을 '머물고, 대화하고, 애도하고, 축하하는' 광장으로 초대하며, 사라져가는 마을의 기억을 오브제·프로타주·영상으로 복원한다. 산호초를 하나의 정치 공동체로 바라보는 보 정의 2채널 비디오 작업은 물고기-인격체의 상상적 대화를 통해 공존의 의사결정, 즉 '비인간의 정치'를 상정한다. 합성생물학의 윤리와 보전의 언어를 실험하는 알렉산드라 데이지 긴즈버그의 시리즈는 "자연"과 "산업화된 생명"이 겹치는 지점을, 욕망과 책임의 감수성으로 가늠하게 만든다. 기술 비평가이기도 한 제임스 브라이들의 태양광 패널 작업은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의제를 의례와 배움의 장치로 환원해, '전기를 생산하는 미술'이 어떻게 공동체의 리터러시로 이어질 수 있는지 실제 사용을 통해 보여준다.
 | 03 | 0 | 금남로 524m를 민주주의의 거리로 기록한 박경근의 '524m'. / 사진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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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라는 맥락은 이번 전시의 기획 논리를 실재의 시간과 접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축이다. 박경근의 연작은 5·18 민주화운동의 현장인 금남로 524m 구간을 다른 시간대의 빛과 그림자, 의례와 기억의 몸짓으로 담아낸다. '524m'와 '15가지 시간'은 '민주주의의 거리'가 개인들의 미세한 동작과 감정의 파동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보여주며, 3D 조형 '부피의 관점'은 익숙한 도시의 표면을 '음각의 기억'으로 뒤집어 공간을 몸으로 기억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지역 기반 콜렉티브 1995Hz는 무등산의 제의와 굿, 그리고 근현대의 단절을 매개하는 퍼포먼스로 "신이 빈 자리"를 사유하게 하고, 김순기의 '숲의 시'는 광주와 카를스루에의 숲, 서로 다른 언어의 낭독을 겹쳐 '다성(多聲)의 민주주의'가 어떤 음향 풍경을 갖는지를 체감하게 한다.
 | 04 | 0 | 아시아 탈사회주의 전환을 탐구한 호 루이 안의 '인민 없는 경제'. / 사진 M+, 방콕 시티시티 갤러리, 켓시리 웡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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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 제작의 성과는 신작에서 가장 분명히 드러난다. 이번 전시를 위해 16점의 신작이 M+·ZKM과 ACC의 지원으로 제작되었다. 장영혜중공업의 '서울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는 카프카 '성'을 참조하며 관료제의 불투명성과 시민의 욕망 사이의 긴장을, 유머와 자의식, 텍스트 기반의 개입으로 밀고 나간다. 싱가포르-중국의 근대화·금융·통치 담론을 파고드는 호 루이 안의 '인민 없는 경제'는 아카이브 리서치와 무빙 이미지가 교차하는 스테이션형 설치로 후기 자본주의의 균열을 '읽는 방법'을 제시한다. 콩고 플랜테이션 노동자 예술 연맹(CATPC)의 '발로 NFT' 프로젝트는 저항의 상징물을 블록체인으로 되살려 판매 수익을 공동체 토지 복원에 투입하는 '예술-제도-경제'의 새로운 회로를 현장에 연결한다. 디지털 전환이 결코 하나의 기술 문제가 아니라, 탈식민과 복원의 윤리·제도 설계의 문제임을 실감하게 하는 사례다.
 | 05 | 0 | 탄소식민주의의 궤적을 추적한 서동진의 '석탄 백탄 타는데: 면-탄-기'. / 사진 작가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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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해로의 존재론적 잠수는 앤 덕희 조던의 다중감각 설치 '깊은 곳으로'가 보여준다. 작품 입구의 스캔으로 관객의 형상이 혼종적 심해 생물로 변이하고, 거울과 프로젝션, 하달대 영상이 만들어내는 몰입 환경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나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로 전치한다. 서동진의 싱글 채널 비디오 '석탄 백탄 타는데: 면-탄-기'는 광주-화순-나고야로 이어지는 탄소식민주의의 역사적 회로를 추적하며, 면업과 광업·기계제 대공업이 얽힌 근대의 폭력과 오늘의 글로벌 공급사슬을 한 화면에 포개어 보여준다. 전시는 이렇게 역사·생태·기술·의례가 얽힌 '복합의 장'을 열고, 개별 작품들이 서로의 맥락이자 반향이 되도록 배치한다.
연계 프로그램 또한 선언의 언어를 확장한다. 9월의 개막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10월 25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렌조 마르텐스의 다큐멘터리 '화이트 큐브' 상영이 CATPC 프로젝트와 교차하고, 11월 13~14일 목·금 오후 2시에는 이끼바위쿠르르의 전통예술 워크숍이 '광장'을 실제 경험의 시간으로 만든다. 12월 6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최찬숙이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를 통해 회전초의 생태적 은유를 리듬과 이미지로 확장하고, 내년 1월 17일 토요일 오후 2시에는 서동진과 호 루이 안의 대담이 리서치와 설치, 동아시아의 통치·경제 담론을 가로지르는 읽기의 방법을 놓고 토론을 이어간다. 또한 매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미디어큐브에서는 장영혜중공업의 하이라이트 영상이 상영되어, 전시와 프로그램 사이의 호흡을 일상적인 리듬으로 연결한다.
이번 전시는 단순한 특별전을 넘어, ACC가 걸어온 10년의 궤적을 압축하는 선언문이다. 2025년 9월 4일 개막해 2026년 2월까지 이어지는 '봄의 선언'은 광주 민주·평화 정신을 출발점으로 삼아, 복합전시1관과 미디어큐브 전역에서 관람객을 맞이한다. 국내외 16명의 작가가 참여해 총 27점을 선보이며, 그 가운데 16점은 ACC와 협력 기관의 지원으로 새롭게 제작된 신작이다. 개막 퍼포먼스와 영상 상영, 전통예술 워크숍, 오디오비주얼 퍼포먼스, 학술 대담 등 9월부터 내년 1월까지 이어질 다채로운 프로그램은 전시가 제안하는 생태적·민주적 메시지를 관객이 직접 경험하는 계기로 확장한다.
특히 이번 프로젝트는 ACC 단독이 아니라, 홍콩의 시각문화 박물관 M+와 독일의 미디어아트 연구기관 ZKM 카를스루에 예술미디어센터가 함께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홍콩의 M+는 20·21세기 시각예술과 디자인·영상·건축을 아우르며 아시아의 독창적인 목소리를 정의하는 데 주력해온 기관이고, ZKM은 전자·미디어 예술의 수집과 아카이브 연구, 심포지엄과 전시를 통해 디지털 시대 예술 담론을 선도해왔다. ACC와 이 두 기관의 연대는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세계적 차원으로 확장시키며, '봄의 선언'을 국제 협력의 상징적 결과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10년을 맞은 ACC의 좌표는 분명하다. 지역의 역사적 기억과 국제 협업의 생산 방식을 동등한 비중으로 껴안으며, '거대한 담론'을 '관객의 몸'에 붙여보려는 시도다. "국제적 협력을 통해 예술이 기후 위기와 사회적 불평등에 대응하는 목소리를 담아낸 기념비적 전시"라는 김상욱 전당장의 말처럼, '봄의 선언'은 거대한 구호를 반복하기보다 선언이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관계의 재구성, 제도의 상상, 감각의 전환―을 작품의 스케일과 밀도로 설득한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광주라는 도시가 지닌 민주·평화의 정신을 '세계적 연대'의 허브로 다시 연결한다. 금남로의 빛과 그림자, 무등산의 제의, 숲의 다성, 심해의 낯섦이 한 전시장 안에서 공명할 때, 봄은 계절이 아니라 태도이자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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